人文,社會科學/時事·常識

[일사일언] 어른 노릇은 어려워

바람아님 2016. 9. 20. 10:32

(조선일보 2016.09.20 길해연·배우)


길해연·배우일주일에 이틀, 부산으로 강의를 하러 간다. 
갈수록 남루해지는 내 의식에 학생들과의 만남은 죽비 노릇을 톡톡히 한다. 
말을 할 때 무책임해지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야 하고 
지치고 게으른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졸업을 앞둔 학생들의 얼굴엔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수심이 가득한데 영화과 한 남학생의 얼굴만 
지난 학기보다 훨씬 평안해 보였다. 
혼자서 무슨 답을 찾아낸 걸까? 수업이 끝나고 마주 앉았다.

"지난 학기에는 끝없이 도태될 것만 같아서 무척이나 초조했었어요." 
그러면서 단편영화를 만들고 영화제에도 다녀오면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부족한 점을 많이 깨닫게 됐어요. 근데 그게 저한테 오히려 도움이 되더라고요. 
처한 상황이나 배경 탓하지 않고 일단 제 부족한 점부터 메우려고요."

부족한 점을 인정하는 얼굴에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장하다, 기특하다. 엄지 척 들어올려 주려는데 옆에 있던 인도네시아 여학생의 말에 내 손이 힘없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저희 나라는 사회 분위기가 보수적이어서 여자가 영화를 만들기 힘들어요. 
이곳은 자유롭고 가능성이 많은 나라인 것 같아요. 기회도 균등할 거 같고요."

칼럼 관련 일러스트
잠시 침묵이 흘렀다. 기특한 남학생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당신 하기 나름이지'라는 말은 너무나 무책임하고, '탁월한 선택이었어' 하기엔 뭔가 뒤가 켕겼다.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가 주어지고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그런 나라는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손에 든 게 없으니 곡괭이 대신 호미라도 들고 자신이 나아갈 길을 만들어 보겠다는 젊은 친구들에게 너희들이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하는 것이 이 사회의 어른들이 할 수 있는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 먼 나라에서 온 여학생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나라가 그런 멋진 나라였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기득권을 가진 어른들이 바뀌어야 한다. 꿈은 젊은이들만 꾸는 게 아니다.

'나 따위가 뭘…'이라고 뒷걸음치지 말고 고민 좀 해봐야겠다. 
그들보다 더 오래 살았으니. 어른값 하려면 뭘 해야 하나. 숙제가 또 하나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