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내가 2017년 2월 졸업 예정자였다면? 줄줄이 F학점을 받고 졸업을 제때 못해 합격이 취소됐을 수도 있다. 다름 아닌 ‘김영란법’ 탓이다. 이 법의 정식 명칭인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에서 말하는 그 부정청탁에 딱 걸리기 때문이다. 학칙에 예외 규정이 없는 한 출석을 안 하고도, 시험을 안 보고도 졸업을 시켜주는 건 위법이란 게 당국의 유권해석이다.
사실 내 인생은 참 많이 달라질 뻔했다. 이 법이 한 30년 전쯤 일찌감치 도입됐더라면 말이다. 기자가 되기 전엔 원래 문학을 전공해 교수가 되고 싶었던 나는 가까운 대학원생 선배들의 마음고생을 지켜보다 지레 꿈을 포기하고 말았다. 평소 교수님들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갖은 정성을 다하는 걸로도 모자라 논문 심사 때가 되면 호텔을 잡네, 식사 대접을 하네 별별 신경을 다 쓰는 게 당시 관례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역시 부정청탁에 해당돼 대학가에서 조만간 사라질 풍경이다.
우여곡절 많았던 ‘김영란법’의 발효가 이제 딱 하루 남았다. 그간 식사·선물·부조금의 허용 한도가 3만·5만·10만원이란 점만 주로 부각되며 ‘3·6·9 게임도 아니고 뭐냐’는 원성이 자자했다. 그러나 이 법의 직접적 적용 대상으로서 범법자가 되지 않기 위해 당국이 내놓은 매뉴얼을 꼼꼼히 들여다본 결과 정작 지키기 어려운 건 주고받는 금품의 액수보다 부정청탁과의 단절이란 생각이 들었다. 위법 행위라는 부정청탁이 실은 우리 생활에 속속들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어쩌다 교통 단속에 걸리면 으레 하는 말이 “한 번만 봐주세요” 아니면 “제일 싼 걸로 부탁해요” 아니었나. 병원에 갈 일이 생기면 사돈의 팔촌까지 동원해 “누구 아는 사람 없느냐”며 수소문하고 말이다. 자녀 학교에 가서도 어떻게든 내 자식이 특별대우를 받게 하려고 갖은 잔머리를 짜내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학생·학부모와 교사 사이엔 ‘3만·5만·10만원 한도’는 고사하고 김밥 한 줄조차 막겠다는 엄격한 법 해석에 충격을 느낄 수밖에!
직접적 대상자는 400만 명이라지만 사실상 온 국민이 평소 습관과 사고의 틀을 송두리째 바꿔야 할 판이다. 최근 사내 교육에선 “회사 후배가 화장실 가는 척하더니 술값 10만원을 몰래 내고 가버리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강사가 “회사 윤리담당관이나 사법당국에 즉시 신고해야 한다”고 답변해 다들 어안이 벙벙해하기도 했다. 같은 언론사 동료끼리라도 선배가 후배에게 사는 건 괜찮지만 후배가 선배에게 사는 건 법에 걸린다나.
이렇듯 막대한 혼란과 부작용을 감수해가며 ‘김영란법’을 받아들이는 만큼 다른 건 몰라도 꼭 한 가지는 얻는 게 있어야 할 것 같다. 바로 지금 이 시점에 우리 사회에 절실한 공정(公正)이란 가치다. 사실 부정청탁이란 게 뭔가. “나와 내 가족, 지인을 다른 사람보다 무조건 잘 봐달라”는 거다. 이런 불공정한 부탁들이 넘쳐나면서 아버지 연줄 따라 군대 보직이 달라지고 엄마 끗발 따라 ‘황제 인턴’의 특혜를 누리는 일들이 줄을 잇는 게 아닌가. 만약 ‘닥치고 실력’만으로 경쟁하는 나라가 될 수 있다면 이 모든 불편을 대가로 치를 만할 터다.
그러자면 내친김에 이 법의 효과가 더 확실히 나도록 맹점들을 말끔히 바로잡아야 한다. 민간기업 임원이 공무원에게 아들 취업을 청탁하면 불법인데 반대로 공무원이 부탁하면 괜찮다는 게 한 예다. 민간기업 임원은 공직자가 아니라서 부정청탁의 상대가 될 수 없다나. 법리상으론 몰라도 국민 정서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런데 아직 첫걸음도 떼기 전에 여기저기서 어찌 그리 매사에 빡빡하게 살라 하느냐는 아우성이 들려온다. 소용없으니 마음 단단히 먹으시라. 아무리 관행이었다 해도 지금은 틀리다.
신 예 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