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장인'을 뜻하는 일본어는 '쇼쿠닌'입니다. 한자로 '직인(職人)'입니다. 일본사전에는 '자신의 기능에 따라 물건을 만드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풀이돼 있습니다. 단순한 기능공처럼 설명되어 있지만, 사실 일본에서 '쇼쿠닌'이라고 하면 그 이상의, 어떤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쇼쿠닌 가타기(장인 기질)'이라는 단어 풀이가 쇼쿠닌의 의미를 더 잘 풀어놓은 것 같습니다. "쇼쿠닌 특유의 기질. 자신의 기능(실력)을 믿고, 자부심을 갖고 있으면서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공을 들여 일하는, 성실하고 정직한 성질." 이런 기질을 갖고 있는 쇼쿠닌 정신, 쇼쿠닌 문화가 일본을 세계 최고의 제조업 강국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쇼쿠닌(장인)을 우대하는 일본의 문화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러 나라의 부러움을 받아왔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일본에 끌려갔던 도공 등 우리 기술자 수만 명이 쇼쿠닌 문화 속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재산을 축적하면서 귀국을 거부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죠.
최근 들어 '쇼쿠닌'은 단순히 제조업 분야뿐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든 오랜 시간을 들여 자신만의 실력과 지식을 키워가는 모든 전문가들과 기술자들을 포함한 개념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일본 방송에서는 이런 쇼쿠닌들을 조명하고, 쇼쿠닌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관심 분야에 열정을 쏟는 사람들을 다룬 프로그램이 적지 않습니다. 대부분 이공계 분야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나오죠. 제가 최근에 본 일본 TV프로그램 몇 개를 소개하면서 제 생각을 몇자 적어봅니다.
● TV도쿄 '도쿄의 오래된 가게들을 떠받쳐주는 장인들'
-일본에선 오래된 가게들을 한자로 '노포'(일본어 시니세)라고 합니다. 이 노포들이 사용하는 각종 기구들을 만든 '쇼큐닌'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지난 18일자 방송에선 아래 요상하게 둥근 가위를 만든 야마모토 씨(78)가 나왔습니다. 가위 안쪽에는 둥근 눈금자가 들어 있네요. 일본에서 저 가위를 만드는 사람은 야마모토 씨 딱 한 사람뿐입니다.
위 가위는 1916년 문을 연 모자전문점 '토라야'에서 사용합니다. 용도는 모자 안쪽 사이즈를 재는 데 씁니다. 손님들이 갖고온 모자와 같은 사이즈의 모자를 찾을 때도 씁니다.
야마모토 씨는 모자업체의 각종 장비들을 만들어주는 회사 '가다마사'의 사장입니다. 도대체 모자업체 기계 시장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요? 아마 시장 규모를 먼저 생각해 뛰어든 것은 아닐 겁니다. 쇼쿠닌은 소비자(모자업체)가 원하는 제품만 만들지 않습니다. 소비자도 몰랐던 불편했던 부분을 먼저 찾아내 신제품을 만들어냅니다.
가다마사의 회사 이름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여러 개의 특허가 함께 검색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즉, 장인은 섬세한 생산능력뿐만이 아니라 고객의 수요를 찾아내 꾸준히 신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이 프로그램에 나온 또 다른 장인업체는 '이케다'입니다. 이 회사는 유명한 프랑스 식당에서 쓰는 '후추갈이 통'(아래 사진)을 만듭니다. 일본 시장 점유율 1위입니다.
이케다는 후쿠갈이 통을 연간 3000여 개 정도 만든다고 합니다. 방송에선 "각 가게나 가정에 맞는 다양한 종류의 후추갈이 통을 300여종이나 만들어낸다"고 하더군요. 그럼, 한 종류를 대량 10개 전후 생산하는 셈이군요. 바로 다품종 소량생산입니다. 일본 장인들의 또 다른 힘이 바로 이 '다품종 소량생산'입니다.
일일이 쇠나 나무를 자르고 갈아 고객 맞춤형 제품을 소량씩 생산하는 것이죠. 이런 것이 가능하려면 사내에 능숙한 숙련공들이 많아야 합니다. 각 숙련공들이 다양한 제품들을 뚝딱뚝딱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쇼쿠닌 회사에서 수십 년 경력의 직원들을 아끼는 이유입니다.
● NHK '초월 절대적인 엄청난 실력!'
기술자와 연구자들이 주어진 경쟁 과제를 수행하면서 자신들이 갈고 닦은 실력을 선보이는 프로그램입니다. 아래 사진은 지난 7월 방송된 내용입니다. 공작기계 장인이 두께 0.5mm, 길이 6cm의 샤프연필 심에 가로로 구멍을 내는 과제에 도전했습니다.
1시간 반 동안 땀흘린 장인. 그 결과는...
물론 이런 비슷한 프로그램은 다른 나라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점이 있습니다. 섬세한 손기술이나 예리한 감각에만 주목하지 않고, 산업현장에서 쓰이는 '제조 장비'를 얼마나 잘 사용하는가? 실제 얼마나 좋은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를 집중적으로 봅니다.
마치 기능 올림픽 경기와 비슷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 반복 연습'만으론 과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물리학과 수학 등을 활용한 연구와 공부가 필요합니다.
위 사진은 이달 초에 방송된 '종이비행기 멀리 날리기' 편입니다. 날개를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야 공기를 잘 탈 수 있는지 등을 연구하는 장면입니다. 참가자들의 이런 연구 과정이 집중적으로 소개됩니다.
● 요미우리TV '새인간 콘테스트'
지난달 31일 방송된 프로그램입니다. 무동력 비행기 제작팀들이 모여 얼마나 멀리 나는지를 겨루는 대회입니다. 벌써 39회째입니다. 아직 쇼쿠닌들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시간과 열정을 투자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대학생팀들이 많지만, 시골 동네를 알리기 위해 나던 동네 젊은 쇼쿠닌들도 있고요. 이공계 회사에서 직원들이 힘을 합쳐 팀을 만든 경우도 있습니다.
1년간 공을 들여 만든 비행기 제작팀원들, 비행기를 탑승한 조종사, 응원하는 대학동료와 지역민들, 방송진행자들의 환호와 눈물이 이어집니다. 사진만으론 감동이 잘 전해지지 않네요. 일본의 쇼쿠닌 문화가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이유를 잘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술력에 대한 찬사를 넘어 그들이 쏟아붇은 시간과 열정을 존중해주고, 이를 응원하는 일본 사회의 분위기가 바로 일본의 쇼쿠닌들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죠. 이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11.1%로 이날 예능 교양 프로그램 가운데 톱 수준이었습니다.
쇼쿠닌들을 다룬 프로그램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지난해 말에는 TBS 드라마 '시타마치 로켓토'(변두리 로켓)가 평균 시청률 18.6%를 기록하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대기업 로켓 제조사에 납품하는 중소 기계업체 이야기입니다. 최고 품질의 부품을 납품하기 위해 밤낮으로 땀흘리는 엔니지어들의 이야기가 그려집니다.
이밖에도 2011-2013년 후지TV에서 방송했던 '호코다테'(창과 방패)라는 프로그램도 유명하죠. 무엇이든 뚫는 드릴업체와 절대 뚫리지 않는 특수금속 제조사의 대결은 굉장했습니다.
과연 이런 프로그램과 드라마가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끌 수 있을까요? 일본 TV를 보고 있으면 언뜻 사회 문화적 기반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아래에 흐리는 돈의 흐름입니다. 장인들은 늘 소비자들을 생각하며 다품종 소량생산에 집중하고-그만큼 소비자들의 만족도가 높습니다-소비자들은 장인들이 들인 시간과 열정에 더 큰 돈을 낼 자세가 돼 있습니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장인들이 만족도 높은 제품을 만들어서 소비자들의 존중을 이끌어낸 것인지, 소비자들의 과감한 소비가 장인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는지...아마 수레바퀴처럼 같이 가는 것이겠죠. 우리나라의 수많은 장인들, 전통 공예품뿐 아니라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 하고 있는 모든 장인들을 응원합니다.
최호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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