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역사 속 숨은 경제이야기] 문익점의 애민정신이 낳은 '의복 혁명'

바람아님 2016. 9. 30. 23:40
한국경제 2016.09.09. 16:36

대학 시절 교수님 한 분이 퀴즈 하나를 내신 적이 있다. 학생들의 실물 경제 감각이 어느 정도인지 보겠다는 의도였다. 교수님은 영화 산업, 의류 산업, 의약품 산업, 휴대폰 산업 등 다양한 산업 분야를 열거하고는 이 중 어느 산업의 시장 규모가 가장 클 것 같으냐고 물으셨다. 당시 많은 학생들이 저마다 나름의 근거를 바탕으로 의견을 제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십억에서 수백억의 제작비용이 투여되는 영화 산업의 시장 규모가 가장 클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는가 하면,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질병으로 인해 상시 복용하는 약의 특성을 들어 의약품 산업의 시장 규모가 가장 클 것이라는 의견, 한 달 동안 지불하는 통신요금이 가장 크다는 사실을 근거로 이동통신 산업의 시장 규모가 가장 클 것이라는 의견 등등 여러 의견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당시 열거한 산업 중에서 시장 규모가 가장 큰 산업은 다름 아닌 의류 산업이었다.


이에 대해 교수님은 옷이 해지거나 낡아야만 새 옷을 사는 게 아니라는 점을 떠올려야 한다며, 방 옷장 안에는 한두 번 입고만 옷들이 그리 많은데 아직도 새 옷을 사는 자신의 소비 패턴을 떠올려보라고 말씀하셨다. 실제로 글로벌 패션문화 산업의 시장 규모는 2012년을 기준으로 약 1,820조 원 규모로, 이는 세계 GDP의 약 1.8%에 해당되는 규모이다. 우리가 일상생활 중 즐겨 구입하는 수백 가지의 품목들을 떠올려보면 이는 단연 높은 수치라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국내의 경우에도 같은 기간 의류시장 규모는 약 40조 원으로, 국내 GDP가 1,000조 원 수준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의류 하나가 거의 4%를 차지하는 셈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국가경제에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는 의류 부분에 있어 가장 현격한 공헌을 한 사람을 한 명 꼽으라면 문익점을 빼고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속옷은 순면 내지 면 합성 소재를 이용해 만들어진다. 이외에도 티셔츠, 남방 등 다양한 의복이 면을 이용해 만들어진다. 물론 이러한 면은 목화씨를 이용해 만들어진 것이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오기 전에는 지배층은 비단으로 속옷 등 여러 의복을 만들어 입었으며, 피지배층의 경우 대부분 거칠거칠한 삼베을 사용해 옷을 만들어 입었다. 이러한 상황을 떠올려 보면 면의 도입이 우리 의복 문화에 가져다 준 변화는 실로 혁명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익점하면 목화씨를 붓통에 숨겨 들여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목화 재배 기회를 제공한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익점의 행보 속에 그의 애민정신이 숨어 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문익점이 활동한 시기는 14세기로 고려 말 공민왕 집권기였다. 문익점은 공민왕 9년인 1360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문익점의 관직은 산간원 좌정언(左正言)으로 좌정언은 에게 간하여 잘못을 바로잡게 하는 역할을 하는 주로 담당하였다. 이러한 좌정언으로 활동하던 문익점이 우리나라 의복혁명의 효시가 되었던 목화씨를 가져오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원나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차출되면서부터이다. 문익점은 원나라 사절단에 서장관(書狀官)이라는 직책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서장관은 원나라 방문 과정 내용을 기록하는 외교적으로 실무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직책이었다.


통상적으로 해외 사절단에 포함된 대부분의 신하들은 귀국한 뒤에 임금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임금에게 보여줄 진귀한 물건 내지 값비싼 물건 등에 관심을 두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문익점의 눈에 들어온 것은 목화 씨앗이었다. 당시 목화 씨앗은 원나라에선 해외 반출금지 품목이었다. 고려 당시에 우리가 면으로 만든 무명옷을 입으려면 전량을 수입해야만 했다. 따라서 목화는 원나라가 엄청난 부를 축척하는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원나라는 목화씨앗이 해외에 반출되지 못하도록 엄격히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목화 씨앗을 해외로 빼돌리려는 문익점의 행보는 외교적 마찰뿐만 아니라 자신의 안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이었다.


우리가 문익점이 의복혁명을 가져왔다고 칭송하는 이유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당시 문익점이 국내로 들여온 목화 씨앗은 총 10개 였다. 이를 장인인 정천익과 함께 반으로 나누어 각각 재배하기 시작하였고, 그 중 단 1개만 싹을 틔우는데 성공한다. 문익점은 어렵사리 싹을 틔운 목화를 대량으로 재배하여 많은 백성들에게 이를 급속히 보급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이를 위해 그는 전국 각지의 유지들에게 목화씨앗을 나누어주면서 이를 ‘너희 동네 근처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줘라.’ 권유한다. 당시 문익점으로부터 목화씨앗을 받아간 사람은 당시 대표적인 세도 가문이었던 남평 문씨, 진주 정씨, 진양 하씨, 상주 주씨, 성주 이씨, 등이었다. 이러한 문익점의 노력 덕분에 변변한 물류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은 당시 목화씨앗은 10년 만에 급속히 전국적으로 퍼져갔다.


문익점은 단순히 목화씨를 재배하는 것뿐만 아니라, 거기서 실을 뽑아내는 기술까지도 연구했다. 물론 문익점이 직접한 건 아니다. 당시 문익점의 장인인 정천익의 집에 기거했던 원 나라의 ‘홍원’이란 승려가 있었는데, 그분이 씨와 실을 뽑을 수 있는 물레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문익점은 목화뿐만 아니라 거기서 실을 뽑는 기술까지 함께 보급할 수 있게 되었다.


흔히 문익점 하면 늘 이야기하는 것 중에 하나가 목화 씨를 붓두껍에 숨겨 왔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다. 이러한 기록은 《고려사》 열전과 《삼우당실기》를 통해 전해내려오는 일화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사실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일설에 의하면 상투에 숨겨 왔다는 내용도 있고, 주머니에 넣어왔다 라든가, 지팡이에 숨겨 왔다는 설들이 있다. 사실 이것들은 후대 사람들이 붙인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나 문익점 사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온 과정을 되뇌며 이처럼 흥미롭게 묘사하여 구전하였다는 사실은 어쩌면 문익점 선생이 가져온 혜택이 너무나도 귀한 것이었기에 이를 칭송하기 위한 일이였을지 모른다.

실제로 조선 시대에 와서 세종대왕은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해 ‘부민후(富民侯, 백성을 풍요롭게 만든 이)라는 이름을 내려 추증(追贈, 나라에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 주던 일)하기도 했다.


박정호 < KDI 전문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