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6.10.03 지해범 동북아시아연구소장)
국가명 '핀란드(Finland)'에 영어 접미사 '~ization'을 붙인 '핀란디제이션(Finlandization·핀란드화)'이
국제정치 용어가 된 것은 1953년이다.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칼 그루버는 대(對)소련 외교를 핀란드처럼 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이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핀란드화'는 '강대국이 인접 약소국의 자결권에 가하는 모든 제한'으로 정의된다
(라루스 백과사전). 핀란드가 이 굴욕적 용어의 주인공이 된 것은 2차 대전 때 두 차례 싸운 소련과
1948년 상호우호협력협정을 맺고 '친소(親蘇) 중립 노선'을 걸었기 때문이다.
서방은 이를 '강제된 중립'이라 비판했지만, 핀란드 총리는 수시로 크렘린을 찾아가 보드카를 마시며
소련 지도자와 현안을 상의했다.
먼 나라 이야기 같던 '핀란드화'가 한국에서도 거론되기 시작했다.
소설가 복거일씨는 2009년 저서 '한반도에 드리운 중국의 그림자'를 통해 중국에 의한 한국의 핀란드화를 경고했다.
그는 "중국이 한국 경제의 중요한 파트너가 되면서 기업은 중국 눈치를 보게 되고, 그것이 정부의 외교·군사 정책에도
영향을 끼친다"며
"한국이 미·중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한다면 미국이 동맹으로 남아 있을지 의문이며,
우리의 핀란드화 가능성은 높아진다"고 말했다.
반면 연세대 문정인 교수는 2년 전 글에서 "(중국의 부상이라는) 동북아 질서 변화가 반드시 '한반도의 핀란드화'를
부를 것이라는 불길한 확신에 시달릴 필요는 없다"고 했다.
'한국의 핀란드화'가 일어날지 아닐지 예단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보다 핀란드 사례에서 어떤 교훈을 얻고, 예속화를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핀란드는 자기 인구(548만명)의 26배인 러시아, 15배인 독일, 1.8배인 스웨덴에 둘러싸여 있다.
강대국 중·일·러에 둘러싸인 우리와 비슷하다.
핀란드는 소련과 무역협정으로 소련 연방이란 큰 시장을 얻었지만 대소 무역 비중이 25~30%에 달해 모스크바의 입김에
취약했다.
한국 역시 대중 수출 의존도가 31%(홍콩 포함)로 핀란드를 닮았다.
중국이 작은 패만 흔들어도 우리 경제가 휘청거릴 지경이다.
게다가 위기를 헤쳐 가는 국민 역량 면에서는 우리가 핀란드보다 낫다고 말하기 어렵다.
게다가 위기를 헤쳐 가는 국민 역량 면에서는 우리가 핀란드보다 낫다고 말하기 어렵다.
핀란드인들은 종전 후 종이와 나무로 만든 신발로 추위를 견디고, 밀가루에 나무껍질 가루를 섞은 빵을 먹으면서도
일치단결해 3억달러의 대소 전쟁배상금을 갚았다.
핀란드 지도자들은 1975년 미·소 등 35개국이 참가한 다자 안보협력체 '헬싱키 프로세스'를 도출해낼 만큼
동서(東西) 가교로서 외교 역량을 발휘했다.
이에 비하면, 북핵과 사드 앞에서 분열하고 갈등하는 우리 모습은 부끄러울 정도다.
'한국의 핀란드화'를 막기 위해 우선은 중국과 경제협력을 지속하면서도 과도한 무역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
일본은 인도·동남아로 투자를 돌려 리스크를 낮추고 있다.
북핵과 사드 문제에서도 우리 정치권이 의견을 모을 때 중국이 함부로 못하고 국제 발언권도 커진다.
아시아에서 약소국이 강대국의 속국으로 전락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 나라 이름을 붙여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낼지 모른다. '코리아'가 그런 조롱거리가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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