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평소 신뢰하던 지인에게 똑같은 말을 또 듣고 나니 다소 충격적인 마음이 들었다. “요새는 취업할 때도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는 말을 하면 안 된대요. 가난을 극복하고 오늘 이 자리에 섰다, 이런 게 하나도 자랑거리가 아니라니까요.” 내 가난의 이력을 떠올리며 공연히 울컥해진 나는 이 지독한 가난혐오가 설마 사실일까 반신반의하며 잘 알고 지내는 헤드헌팅 업체 대표에게 물었다.
“가난한 집안 출신을 선호하지 않는 건 사실이죠. 같이 일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니까.” 가난한 사람들은 비리나 부정부패를 저지르기 상대적으로 쉽고, 성격적으로도 원만하지 않아 조직문화에 융화되기 힘들다는 게 사회통념이 돼 가고 있다는 것이다. “가난함과 고생담을 강조하는 것도 성실함을 알려줄 수 있지만 이미 많은 사회적 경험을 통해 회사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해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취업면접 노하우를 알려주는 어느 경제지 인터뷰 기사에서 모 기업체 대표가 에둘러 표현한 이 말이 바로 그런 뜻일 터. 가난한 사람들은 그러니까 우리 사회에서 ‘시방 위험한 짐승’들이다.
가난을 전염성 질병으로 여기며 기피해온 이 사회가 그래서 누구나 잘 사는 부자사회이기나 하면 좋으련만, 사람들-특히 청년들-은 대체로 더 가난해지고 있다. 그런데 둘러보면 가난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가난을 숨기는 것이 시대의 에티켓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가난은 드러내면 무례한 것, ‘댁에게 이런 꼴을 보게 해 몹시도 송구한’ 바바리맨 같은 그 무엇이 되었고, 사람들은 가난을 숨기기 위해 유행이라는 시대의 헌법을 따른다. 대개가 가난한데 아무도 가난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야 하는 시대.
청년들은 가난하다면서 왜 고가의 스마트폰을 사고, 패스트 패션을 사 입으며, 유명 맛집의 음식 사진을 소셜 미디어에 올리는가. 가난-바깥으로의 탈주에 성공한 기성세대가 가난을 혐오하고 경멸하며, 그런 더러운 태도와 정신을 세상에 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내게서 가난의 냄새가 난다면 여러분은 몹시 불편하실 테지요. 구질구질하게 가난 얘기 같은 것은 듣고 싶지 않잖아요?’ 이렇게 따져 묻는 청년 앞에서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미당의 시를 나는 인용할 수 없다.
부르주아의 건강성이라는 것을 세상은 너무 맹신한다. 윤리마저 금수저에게만 허락된 사치쯤으로 여기며 가난한 이들의 도덕의지를 멸시한다. 결핍 없는 삶이 부여한 넉넉한 인심과 꼬인 데 없이 해맑은 영혼이 어떤 부르주아들에게는 있다. 그렇다고 프롤레타리아의 건강성은 존재하지 않는가. 기자로서 나는 가난이 굴복시키지 못한 인간의 존엄과 품격을 증거하며 윤리가 부의 산물인 양 거들먹거리는 자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 책임을 느낀다. 어제의 가난이 오늘의 가난을 예고하고, 오늘의 가난이 내일의 가난일 수밖에 없는 이 출구 없는 터널에서 어쩌면 그것은 종교적 체념이거나 정신승리이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가난해서 죄송한 세상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순 없다.
취업 시즌이다. 아직도 ‘느그 아부지 머 하시노?’를 묻는 입사지원서가 수두룩하다. 이것만이라도 못하도록 블라인드 면접을 의무화해야 한다. 수저결정론의 공고한 터널에 작은 구멍이라도 하나 내야 한다. 가난이라는 게 젊어 한때는 사서도 할 만한 일시적인 것이어야 우리는 미당의 시를 읊을 수 있다. 지금 나는 자꾸만 미당에게 화가 난다.
박선영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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