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6-10-05 03:00:00
동네 술집 창가 자리에서 에디터와 이야길 나누고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소식이 끊겼다고 생각한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반갑게 연락처를 주고받자마자 친구가 진짜로 궁금하다는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너 아직도 손수건 갖고 다니냐?”
책 읽는 사람이 줄어들었고 한국 문학이 위기라고 해도 막상 소설 창작 강의실에 들어가 보면 그렇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학생들의 눈빛은 진지하다 못해 안쓰럽게까지 느껴질 때가 많다. 수업시간에 가끔 글쓰기를 시키고 낭독을 하게 하는 날이 있다. 이제 스무 살 혹은 이십대 초반의 학생들은 부모에 관해, 엄마가 끓여준 김치찌개에 관해 소리 내 읽다가 그만 울음을 삼킨다. 경청하고 있던 학생들도 여기저기서 훌쩍훌쩍. 선생이라고는 해도 그럴 때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그저 슬그머니 다가가 손수건을 건네주는 일밖에는. 그런 일이 자주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새 나는 손수건을 두 개나 들고 다니는 사람이 돼 버렸다.
일본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작품 중에 ‘손수건’이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교수의 집으로 한 부인이 방문을 온다. 그 교수에게 신세를 많이 진 학생의 어머니라고 밝힌 부인은 아들의 죽음을 알리면서 그동안 고마웠다는 인사를 전한다. 교수는 그런 가슴 아픈 소식을 전하면서 눈물을 글썽이기는커녕 입가에 미소까지 띠고 있는 듯 보이는 부인의 모습이 이상하다고 여긴다. 손에 들고 있던 부채가 떨어져 교수가 바닥으로 고개를 숙였을 때 맞은편 의자에 앉은 부인의 무릎을 보게 된다. 떨리는 양손으로 무릎 위의 손수건을 “찢어질 듯이 꽉 쥐고 있는”. 그제야 교수는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실은 그 부인이 “전신으로 울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이야기.
다림질 후 잔열로 손수건을 다린다. 다림질을 싫어하는 어머니가 아무렇게나 접어둔 아버지 손수건이 보이기에 그것도 다린다. 아버지 손수건은 낡아서 거의 해질 지경이다. 지난여름에도 동생이 손수건 몇 장 사드리는 걸 봤는데. 부모는 왜 새것들을 장롱 안에 고이 모셔두고는 이토록 낡은 것을 계속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얇고 납작한 손수건 두 개 중 한 개는 나를 위해 쓴다. 손도 닦고 밥 먹고 입가도 문지르고. 예외적인 순간이 찾아올 때는 더욱 쓸모가 있어진다. 며칠 전처럼 간암으로 아버지가 희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제자가 소식을 전해왔을 때도, 한 시민의 죽음을 애도할 때도.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핑크색 손수건을 주먹으로 꽉 움켜쥐었던 때가 떠오른다. 너무나 들어가고 싶었던 문예반을 전교 성적순으로 뽑는다는 사실을 안 순간.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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