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2.09.02 손철주 미술평론가)
- '장만 초상' - 작자 미상, 비단에 채색, 240×113㎝, 17세기, 경기도박물관 소장.
이 초상화를 보는 이라면 누구나 모자 아래 시커멓게 그려놓은 곳으로 눈길이 가게 돼 있다. 다른 데도 아니고 얼굴에 저게 뭘까. 알겠다. 큼지막하게 한쪽 눈을 가린 것은 안대(眼帶)다.
요즘으로 치면 액션영화에나 나올 만한 분장인데, 조선시대 초상화에 저리 버젓하게 등장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이분, 이력이 만만찮은 어른이다. 인조 때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로 병권(兵權)을 오래 잡아 국방과 안보에 관한 식견이 남달랐다. 그는 장만(張晩·1566~1629)으로 형조판서와 병조판서도 지냈다.
장만이라는 이름이 생소한가. 그의 사위가 병자호란에서 주화파로 나섰던 최명길(崔鳴吉·1586~1647)이다. 그래도 고개가 갸웃해진다면 그의 이름을 소리 내 읽어보라. '필요한 걸 미리 갖춘다'는 뜻인 우리말 '장만'은 그에게서 나왔다는 속설이 있다. 그만한 까닭이 충분하다. 장만의 일생은 왜란과 호란을 다 거쳤는데, 고비마다 군사전문가로 변방을 잡도리하며 뼈 빠지게 대책을 올렸다.
그런데 눈은 무슨 일로 탈이 났을까. 그는 이괄의 난을 평정하다 병든 몸을 혹사하는 바람에 실명했다. 그 일로 장만은 1등 공신이 됐고, 조정은 그에게 이 초상화를 헌정했다.
초상화는 꽤 고식(古式)이다. 푸른색 관복에 붙은 흉배가 앞가슴을 덮을 만큼 큰데, 수 놓인 공작 한 쌍이 그의 1품 품계를 알려준다. 바닥의 꾸미개는 화려한 기하학적 문양이다. 정작 장만의 얼굴은 시난고난한 흔적이 또렷하다. 가까이서 보면 마마 자국을 뒤집어썼고, 턱으로 내려오는 선이 가파르며, 수염 올올이 성기다. 수(戍)자리의 고역이 길어선지 홀쭉한 낯이다.
장만이 지은 시조가 있다.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물도곤 어려워라
이후란 배도 말도 말고 밭 갈기만 하리라.
배를 몰든 말고삐를 잡든, 세상에 거저먹는 일이 없다. 밭 갈기인들 편하랴. 사람 일은 얼굴로 가서 새겨진다.
(주석)
*.도고 [조사] "보다"의 잘못.
(서로 차이가 있는 것을 비교하는 경우, 비교의 대상이 되는 말에 붙어 ‘~에 비해서’의 뜻을 나타내는 격 조사)’
* 구절양장(九折羊腸) 아홉 번 꼬부라진 양의 창자라는 뜻으로, 꼬불꼬불하며 험한 산길을 이르는 말
(해설)
세찬 바람과 험한 물결에 놀란 사공이 배를 팔아 버리고 말을 샀다.
그러나 웬걸, 꼬불꼬불하여 험한 산길을 가기가 물보다 더 어렵다.
그래서 결국 배도 말도 모두 버리고 농사나 짓겠다는 것이다.
‘풍파’나 ‘구절양장’은 모두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뜻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특히 벼슬살이의 어려움을 나타낸다.
'文學,藝術 > 고전·고미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25] 고주망태 酒暴들은 늘 골칫거리였다 (0) | 2013.08.03 |
---|---|
[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24] 이 그림이 스님 초상화라고?… 꼭 얼굴을 보아야만 보았다고 하겠는가 (0) | 2013.08.02 |
이규보 - 영정중월(詠井中月), '우물 속의 달을 노래하다' (0) | 2013.07.31 |
[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22] '18년 영의정' 비결은… 희로애락 감춘 낯빛에 담겼소 (0) | 2013.07.31 |
[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21] 세월을 탓하지 말라, 大義는 망설일 수 없는 것 (0) | 2013.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