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2.09.16 손철주 미술평론가)
- 김후신 '대쾌도' - 종이에 담채, 33.7×28.2㎝, 18세기, 간송미술관 소장.
때는 가을, 나무 잎사귀에 단풍이 슬슬 물들어간다. 무대는 숲길, 아름드리나무들 사이로 개울이 졸졸 흐른다. 그런데 느닷없이 왁자한 소리가 들리나 했더니 이 무슨 난장판인가. 고주망태가 된 술꾼들이 서로 뒤엉켜 엎어지고 자빠지고 수선스럽기 짝이 없다. 그것도 벌건 대낮에 말이다. 갓 쓰고 도포 입은 차림새는 버젓한 반촌(班村) 사람들인데 행실은 도무지 꼴불견이다. 뭣들 하는 꼬락서니인지 하나하나 뜯어보자.
가장 골칫덩이는 가운데 사람이다. 망건 위로 상투가 아예 수세미가 된 작자다. 그는 벌써 정신 줄을 놓았다. 갓은 어디서 벗겨졌는지 없고, 대자(大字)로 쓰러지며 고래 고함을 지른다. 술 취한 패거리가 해대는 수작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그 때문에 낭패를 보는 쪽은 덜 취한 이들이다. 앞사람이 손목을 잡아끌지만 해롱대는 놈은 누구도 못 당한다. 곁에서 겨드랑이를 부축해도 악다구니 쓰며 버티면 도리가 없다. 뒷사람은 온 힘을 다해 등을 받쳐주다가 제풀에 고꾸라질 판이다. 가을의 적막을 깨는 취객(醉客)의 소란에 나무들이 다 놀랐다. 줄기에 크게 파인 자국이 마치 휘둥그런 눈처럼, 딱 벌어진 입처럼 보인다.
이 그림을 그린 이는 조선 영·정조 때의 화가 김후신(金厚臣)이다. 그는 술 마신 뒤끝이 볼썽사나운 양반들을 풍자했다. 제목은 '대쾌도(大快圖)'라고 했지만 남이 보면 불쾌(不快)한 장면이다. 김후신이 활동했던 영조 시절은 금주령이 엄혹했다. 벼슬아치가 술 취했다는 이유 하나로 임금이 그의 목을 베어버리기도 했다. 몰래 술 마시다 들켜서 귀양살이 떠난 이도 속출했다. 요즘 주폭(酒暴)이 들으면 오금이 저리겠다.
상쾌한 주도(酒道)는 정녕 찾기 어려운 것인가. 중국 송나라의 학자 소옹(邵雍)이 읊은 시에 귀를 기울여 보자.
'좋은 술 마시고 은근히 취한 뒤(美酒飮敎微醉後)/
예쁜 꽃 보노라, 반쯤만 피었을 때(好花看到半開時).'
이 좋은 양생법(養生法)을, 술꾼들이여, 어찌 그리 모르시는가.
(참고1-김후신의 大快圖 큰이미지)
(참고2-김후신의 또다른 大快圖)
*.이유신(李維新)_가헌관매도(可軒觀梅圖)
좋은 술 마시고 은근히 취한 뒤(美酒飮敎微醉後)
예쁜 꽃 보노라, 반쯤만 피었을 때(好花看到半開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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