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조선시대 그림 가격은 얼마였을까(1)

바람아님 2013. 8. 5. 11:45



조선시대 그림 가격은 얼마였을까


↑ 김홍도 <송하취생도(松下吹笙圖)> ,종이에 수묵 담채, 109x55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그림 가격은 어땠을까. 기록은 많지 않다. 유교 문화가 뿌리 깊이 지배한 조선 사회에서 는 미술품 거래 가격이나 미술애호가의 후원 내역에 대한 흔적을 남기는 걸 꺼려한 때문이다. 그렇지만 몇몇 드물게 전해지는 기록들은 그림 값에 대해 흥미 있으면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서화 수장 문화가 본격화되지 않았던 조선 초기, 화공들에 대한 사례는 크지 않았다. 회화 제작을 예술이 아니라 기술로 보고 천시했던 시대적

분위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16세기 초 이문건(1495-1567)이 쓴 <묵재일기>에 전하는 내용이다. 

성주 지방 양반인 이문건이 지방 관청에 소속된 화사들에게 주문했던 그림 내역을 적은 이 기록을 보면 화가들에게 지불했던 사례는 형편없었다. 족자, 병풍, 매 그림 등을 주문하면서 그가 화공들에게는 지불한 것은 쌀, 소금, 휴지, 간장 등 생필품 약간 정도였다. 
지방 관청 소속의 이름 없는 화가들이기는 하지만 심부름 값 정도로 밖에는 이해되지 않는 수준이다. 양반에게는 또 다른 방식으로 사례했다.

당시 초서로 유명했던 황기로의 경우 그의 초서 몇 점을 얻기 위해서는 집으로 초대해 식사 대접을 하고 글씨를 부탁하는 방법을 썼다. 물질적인 거래를 부끄럽게 여긴 유교 문화 탓이다. 함께 장기를 두면서 식사를 대접하는, 이를테면 인적 네트워크 제공(?)이 그림 값에 대한 사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18세기 이후 확 달라진다. 상공업과 화폐 경제의 발달로, 서울의 누대 명문가를 중심으로 시작된 서화 완상 풍조가

신흥 부자로 부상한 중인층에게까지 확산되면서 금전으로 값을 지불하는 문화가 서서히 정착되었다. 

값 또한 어마어마하게 높아졌다. 청나라 사람이 조선 사람으로부터 화첩을 은 석냥 닷푼을 주고 샀다는 등 금전거래에 대한 기록들이 늘어난다. 또 그림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집단 제작 시스템까지 구축되기에 이르는 걸 보면 그림의 상거래는 아주 활기있게 이뤄졌을 것이다.

김홍도, 신한평, 김응환, 이인문, 한종일 이종현 등 이름난 화원 화가들이 강희언의 집에 모여서 나라의 그림 주문 뿐 아니라 고관 대작의 그림

주문에 집단적으로 응했다는 것이 그 예다. 


옛날에도 집 한 채 값은 줘야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 김홍도의 그림 값은 얼마 였을까. 조희룡의 <호산외기(壺山外記)>에 누군가 김홍도에게 그림을 주문하면서 3천 전(錢)을 제시해 응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상평통보 1개는 1푼, 10푼이 1전, 10전이 1냥이다. 따라서 3천전은 3백냥이다. 18세기 쌀 1섬의 평균 시세가 5냥이었으니 3백냥은 쌀 60섬에 해당한다. 요즘의 쌀값으로 단순 비교하면 300냥은 약 2600만원이다. 1섬은 144㎏이니 60섬은 8640㎏. 이를 20㎏짜리 쌀 1포 값을 6만원 정도로 계산한 것이다.

쌀값이 생산량 증대로 가격이 크게 하락한 것을 감안한다면 300냥의 가치는 이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어쨌거나 당대 최고 화가 김홍도가

비단이나 종이에 스윽 그린 묵화 한 폭의 값어치는 적지 않았다는 얘기다. 

김홍도는 워낙 주문이 밀려 잠자고 밥 먹을 시간 조차 없었다는 인기 화가였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김홍도 보다 앞선 시기를 산 겸재

정선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사천 이병연은 겸재와 같은 동네인 북리에서 살아 겸재의 그림을 많이 갖고 있었다. 

그가 정선이 그린 금강첩을 어느 집에 팔았는데, 은화 30냥을 받았다고 한다. 또 관아재 조영석은 정선이 1733년 8월 하양현감으로 부임해

가던 해 쓴 기록에서 겸재의 그림 값으로 3000전을 언급하고 있다.

 


↑ 정선 <백운동(白雲洞)> 영조 31년(1755)경, 종이에 엷은 색채, 29.5x33.0cm, 
<<장동팔경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문생(文生)이라는 사람이 3000전으로 정선의 화권을 샀다는 것이다. 그 3000전은 논밭 몇 마지기를 사 둘 수 있는 돈이라고 했다. 3000전의

당시 가치를 어림잡을 수 있는 기록이 있다. 10여년 뒤인 1742년, 송문흠(宋文欽)과 신소(申韶)가 화가 이인상을 위해 남산 기슭에 작은 집을

마련해 주면서 치렀던 3000전이라는 것이다. 

주거지역으로서 남산은 어떠했는가.  조선시대는 종로를 기점으로 북쪽인 경복궁 주위의 북촌에는 종친과 고관대작이 살았다.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양반행세를 하던 문인들이 남산 주변에 살았다.  조선시대 한양의 강남격인 북촌 주변이니 괜찮은 곳이었다.   

조선시대 대표 컬렉터 서상수가 가난에 시달리는 이덕무에게 소장하고 있는 골동품을 팔아 집을 사주었다는 일화도 당시 명품 서화 골동품 값이

부동산 가격에 맞먹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뒷받침한다. 

정선이나 김홍도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이른바 당시의 ‘국민화가’들이었다. 이들은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주문 그림이 밀려들었을 정도였고

생존 당시에도 이처럼 그림 값이 집 한 채 값 정도였다고 하니, 이들의 그림을 소장하는 건 서민층은 물론 웬만한 양반에게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림 소장은 서민에게는 ‘그들만의 문화’일 뿐이다.  

컬렉션은 조선 초기에는 왕자나 고관대작의 향유문화였다. 또 서화완상 문화가 유행을 하기 시작한 18세기 이후에도 경화세족들, 이른바 서울에

살면서 대대로 벼슬을 하는 경화세족들에게나 가능한 고급하고 아취 있는 문화였다. 중인층으로 확산되면서 대유행이 됐을 때도 상업적으로

공한 역관, 의관 출신의 중인층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명문가마저도 서화에 빠지면 가산을 탕진하기 일쑤였다. 그림을 좋아하다 거지 신세가 된 육교 이조묵이나 상고당 김광수의 사례는  서화

골동품 값이 얼마나 비쌌는지를 그들의 삶을 통해 웅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