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조선시대 그림 가격은 얼마였을까(2)

바람아님 2013. 8. 5. 23:16


관료도 고리대금업을 해야 그림 살 수 있어


사실 서화골동품을 수장하는 것은 웬만한 재산으로는 뒷받침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강명관 선생은 권력과 부, 여기에

가문의 지속성을 예술품 수장의 조건으로 제시했다.  서화 수장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가문의 역사였던 것이다. 

조선 초기 안평대군은 종친으로서 국가로부터 지원받은 토지가 기반이 돼 방대한 서화를 수장할 수 있었다. 관료들도 나라에서

받는 녹봉, 즉 월급만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명나라 대수장가 항원변(1525∼1590)이 관직에서 받는 녹봉 외에 막대한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전당포를 운영했던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 윤두서 <자화상>, 17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38.5 x 20.5 cm , 개인 소장.
 윤두서의 그림은 중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전당포 사례는 없지만 고리대금업이 서화 수장의 기반이 되었음은 비쳐진다. 훈구 공신들은 나라로부터 받은

토지가 밑천이었지만 이를 통해 고리대금업을 함으로써 부를 늘렸다. 성종실록에는 관료 출신 서화수장가였던 정인지(鄭麟趾)

가 고리대금업을 통해 인근 사람의 집을 빼앗았으니 ‘삼노(三老)’로 삼지 말 것을 청원한 기록이 있다.

훈구파 대신 윤필상(尹弼商, 1427∼1504)의 경우 농장이 충주에 있었는데, 지역민들의 원성을 들을 만큼 장리행위를 자행했다

고 한다. 정인지 윤필상 모두 시서화에 관심이 많았던 고위과료들이었다. 서화완상과 수집이라는 것은 양반이라면 누구나 의례

히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 철저한 경제활동이 뒷받침된 결과였다. 축재를 위해서는 부정한 방법도 동원되었던 것이다.
 


↑ 윤두서 <팔준도> 중 사자황(獅子黃)과 용등자(龍藤紫),
 비단에 채색, 42.5x 35.0cm . 국립광주박물관


조선 전기 양반 관료들이 토지소유권과 관직을 이용해 부를 늘렸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상업 경제가 발달하면서 부의 축적

수단도 달라졌다. 화폐 경제의 도입 18, 19세기 경화사족들과 함께 중인들이 부상한다. 상업이 부의 원천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김홍도의 후원가였던 염상 출신 거부 김한태였다.  윤두서의 그림 소장자가 ‘수표교에 사는 최씨’ 등 중인들이 많았다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컬렉터의 명단에 천죽재라는 고동서화 수장처를 별도로 갖고 있던 오경석 , 역관출신으로 김정희의 애제자

였던 이상적 , 의관을 지냈던 김광국 등 요즘으로 치면 비즈니스 맨들이 부상하기에 이른 것이다. 


보통 사람의 서화 컬렉션은


↑ 소상팔경도-어촌석조(漁村夕照)-강마을의 저녁놀. 
16세기 , 비단에 수묵, 35.4 x 31.1 cm , 국립중앙박물관


하지만 부자의 문화는 따 라하고 싶은 법이다. 19세기로 가면 경아전 서리의 집까지 그림으로 채워 졌다고 신위는 개탄했지만

서민들의 수장욕을 막을 수는 없었다.  요즘, 루이비통 가방을 젊은 여성들이면 누구도 갖고 싶어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얼마나

무리를 해서 갖는지, 위조품이라도 갖고 싶다는 욕망 때문인지, 루이비통 가방은 100m마다 눈에 띈다고 해서 ‘100m 가방’

이라고 불리지 않는가.
 


↑ 소상팔경도-연사모종(煙寺暮鍾)- 안개 낀 절의 저녁 종소리
 16세기, 비단에 수묵, 35.4 x 31.1cm, 국립중앙박물관


19세기 중인 서민의 그림 치장 문화가 그러했다. 19세기 중반 광통교 부근에는 서점과 골동품 사치품을 파는 가게들도

즐비했다. ‘광통교 아래 가게 각색 그림 걸렸구나’라고 한양가는 전하는데, 이 곳에 걸려 있는 그림들은 <십장생>, <구운몽>,

<삼고초려도>, <귀거래사도>, <경직도> <소상팔경도> 등이었다. 주문 그림이 아니라 판매용으로 대량생산된

기성품들이었다. 

경직도를 걸어두고 흐뭇해했을 조선시대 후기의 한 서민을 떠올려보라. 비싼 유화작품은 엄두를 못 내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판화나 고흐 해바라기의 영인본을 걸어두고 심미적 만족감을 느끼는 우리네 서민 중산층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