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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이성호]서울의 위험한 민낯

바람아님 2016. 10. 26. 23:35

동아일보 2016-10-26 03:00:00

이성호 사회부 차장

 1, 2년에 한 번 한국을 찾는 외국인 지인은 매번 남산에 오른다. 내가 바쁘면 혼자서라도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남산을 찾는다. 그는 야경을 볼 때마다 감탄사를 터뜨린다. “서울 같은 대도시 한가운데 산이 있는 것도 놀랍고 정상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정말 환상적이다.”

 가수 싸이의 글로벌 히트곡 ‘강남스타일’은 서울의 강남을 단숨에 지구촌 ‘핫플레이스’로 만들었다. 해외 유명 블로거들은 지금까지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 끊임없이 강남 방문기를 올린다. 낮에는 축구장처럼 넓은 왕복 10차로 도로와 즐비한 고층빌딩에 놀라고 해가 지면 화려한 밤거리에 환호한다.

 외국인 관광객뿐이랴. 젊은이들은 신사동 가로수길과 이태원 경리단길로 몰리고 있다. 개성 넘치는 식당과 카페 클럽은 젊은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서울의 정보기술(IT) 환경도 대단하다. 어지간한 곳에서는 무료 와이파이를 통해 인터넷을 공짜로 펑펑 쓸 수 있다. 외국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만하다.

 이런 모습을 보면 서울은 참 아름답고 매력적인 도시다. 세계 어느 도시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서울의 민낯은 어떨까. 화려함에 가려 보이지 않던 서울의 맨얼굴을 마주하게 되면 첨단 기술과 마천루에 현혹됐던 당신의 생각이 180도 바뀔 것이다.

 서울의 민낯은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당신이 매일 걸어다니는 출퇴근길이나 소중한 자녀들이 다니는 등하굣길 아래에 있다. 당신이 걷던 길이 당장 내일 무너져도 전혀 놀랄 만한 상황이 아니다. 서울의 기반시설은 대부분 1970년대에 만들어졌다. 30년 이상 된 ‘늙은 시설’이다. 사람으로 치면 60대를 넘겨 70대에 접어든 정도다. 이런 늙은 시설이 도로의 27.5%, 건축물의 46.5%다. 특히 하수관로는 절반(48.4%)에 가깝다. 길을 걷던 사람이나 달리던 차량이 갑자기 나타난 싱크홀(도로 함몰)에 빠지는 건 십중팔구 물이 줄줄 새는 낡은 하수관로 때문이다.

 땅속에는 걱정거리가 또 있다. 바로 지하철이다. 올 1월 지하철 4호선 당고개행 열차가 한성대입구역 근처에서 고장 나면서 승객 수백 명이 대피했다. 사고 전동차는 출고된 지 23년이 지났다. 이런 낡은 전동차가 서울 땅속에 3000량이나 다니고 있다. 서울메트로(지하철 1∼4호선) 전동차의 60%, 서울도시철도공사(지하철 5∼8호선) 전동차의 51% 이상이다. 선로나 전력설비, 터널 내 송수관 등 안전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설비들의 노후화도 심각하다.

 우리보다 먼저 늙어간 선진국도 몸살을 앓았다. 1966년부터 2005년까지 미국의 교량 약 1500개가 붕괴됐다. 일본도 1964년 도쿄 올림픽 전후에 지어진 기반시설이 수명을 다하면서 유지관리 비용이 치솟았다. 그래서 나온 것이 2012년 미국의 MAP-21 법안과 2013년 일본의 시설물 장수명화(長壽命化) 계획이다. 공통점은 낡은 기반시설 문제 해결을 국가 최우선 과제 중 하나로 꼽았다는 것이다.

 서울의 기반시설은 갈수록 늙는다. 서울시에 따르면 앞으로 20년 뒤 도로 등 주요 기반시설의 80% 이상이 지은 지 30년이 훌쩍 넘어간다. 우리 사회는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회색 코뿔소(Gray Rhino)’ 현상이다. 위험성을 뻔히 알지만 익숙하다는 이유로 일상 속 재난을 무시하는 것이다. 위험 신호가 계속되는데도 애써 인정하지 않는 회색 코뿔소가 우리 사회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어쩌면 나였을지도 모를 평범한 직장인이 출근길 지하철역에서 숨지는 사고를 보면서 당장 내일 출근길이 걱정된다.
 
이성호 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