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時事·常識

<살며 생각하며>역사 속 삶과 현실의 삶

바람아님 2016. 10. 28. 23:41
문화일보 2016.10.28. 14:40

방민호 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춘원 이광수의 서울 종로구 홍지동 산장. 자하문 넘어 상명대 올라가는 길옆에 있다. 자하문을 넘어가면 같은 서울이라고 해도 한결 운치가 있다. 옛날에는 더 그랬을 것이다. 북한산 가까운 서울은 상서롭게 보인다. 춘원이 6년 만에 이 별장을 팔고 속세로 ‘다시’ 나온 것은 1939년. 그때 시세로 6000원을 받았다. 채만식이 안양천 둑 위에 지어진 집을 사려고 안간힘을 쓸 때 그 집은 불과 400여 원이었다.


별장은 옛날에 있던 집은 없어지고 대신에 향나무 한 그루만 옛 유적을 보여준다. 화려한 저택이었겠지만 지금은 춘원 별장이라는 표지만 남았을 뿐, 그의 가족들은 미국에 있다.


수양동우회를 결성해 활동한 것이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으로 다뤄져 그는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병보석 상태로 재판을 받았다. 작가 김동인은 춘원의 동우회 동지인 형의 용건을 전하면서 ‘주제넘게’ 자결을 권했다. 살아 오욕을 남기느니 죽어 이름과 명예를 보전하라는 것이었다. 춘원은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김동인의 생각이 맞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춘원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전향, 절의(節義)를 파는 과정에서 채만식도, 김동인도 모두 그를 따라 변절을 겪었다. 그들은 마치 세월 모르는 사람들처럼 해방 직전까지 대일 협력에 치우쳤다. 이광수만은 일본의 패전을 목전에 두고 경기 남양주의 사릉(思陵)에 칩거, 사세가 기울었음을 깨닫고 있었다. 다만, 일본이 전쟁에 지면 조선이 해방될 수 있음은 몰랐을 가능성이 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라면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다. 사람은 고통 앞에서 일분일초도 견디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이기는 해도, 그 엄혹한 시절에도 이육사나 윤동주나 김광섭, 이병기 같은 사람들은 있었다. 하지만 이광수는 견디지 못했다.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 앞에서 나이 들고 병든 그는 무력했다.


홍지동 산장 옆에 탕춘대성(蕩春臺城)이 있다. 서울, 한양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성이다. 가까운 곳에 연산군 재위 마지막 해에 지었다는 탕춘대라는 누대가 있어 붙은 이름이다. 이 ‘탕춘’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이 얼마나 기막힌 이름이냐고 탄복하게 된다. 봄이 왔으니 그 봄이 다하도록 즐겨보자는 뜻이리라. 연산군은 탕춘대를 짓고 오래도록 젊음을 탕진하는 삶을 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봄이 왕으로서뿐만 아니라 인생의 마지막 봄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마지막 해 재위 12년째 기록을 보면 그는 탕춘대를 짓고 잔치를 벌이고 수시로 신하들에게 시를 내려 화답하게 했다. 놀고 마시고 짓기를 좋아하는 호방한, 그러면서도 폐비 윤 씨 어머니의 처참한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 했던 불쌍한 왕이었다. 그러나 지혜롭지 못한 왕이었고, 자신의 미래를 점칠 줄 모르는 왕이었다. 연산군일기의 많은 부분이 중종반정 주체 세력의 시각에 의해 변색됐을 듯하지만 큰 맥락은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역사는 참으로 무섭다. 그 시대를 살아갈 때는 모르지만, 시간이 흘러가고 나면 많은 것이 속속 드러난다. 물론 감춰지기도 하지만 비록 증명되지는 못한다 해도 저절로 인식되는 것도 많다. 진실과 정의가 늘 이기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통성(通性)’은 결국 정의롭고 희생적이고 떳떳했던 사람 편에 서게 된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살아 영화를 누리면 됐지 죽어 오명이 아랑곳이나 할 것이냐. 그러나 오래 산들 올드 토머스 파처럼 152년을 살 것이냐. 언젠가는 기어코 죽을 목숨을 타고난 바에야 언제,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보통 사람도, 예를 들어 의식불명 상태에 빠질 때를 대비해서 생명 연장 시술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또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았다고 할 때 병원에서 무리한 치료를 계속할 것인지,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최근 문학계에는 다시 ‘친일 문학상’ 논란이 일고 있다. 춘원과 육당 최남선을 기리는 문학상, 학술상을 만든다는 소식이 들리자 이를 반대하고 나아가 동인문학상처럼 이미 뿌리를 내린 상에도 문제를 제기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춘원연구학회(회장 송현호)에서 이 문제를 두고 심각한 논의를 거듭한 끝에 이번의 춘원문학상 제정에 반대하기로 의견을 모은 것은 지혜로운 일이었다. 이광수의 문학이 하등의 가치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 그의 문학을 기리는 일은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이광수의 근대문학 선각자로서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고 인정하면서도 그가 남긴 어둠의 요소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시선을 잃지 않는 복합적이고도 입체적인 연구가 필요하고, 그 바탕 위에서 그의 문학을 어떻게 ‘취급’ ‘처리’할 것인지를 따져 나가야 한다.


역사적 삶보다 살아 있는 자연인으로서의 삶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같은 시대, 같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타인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내가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지금 함께 호흡하는 이 나날들이 연산군이나 이광수의 시대와 다를 게 없다. 지금 똑같이 살고 죽음이 있고,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에 대한 물음이 있다.


신문·방송·팟캐스트를 접하면 난세도 이런 난세는 더 없을 듯싶다. 이런 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견뎌야 하는지, 엄정해져야 하는지, 침묵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힘든 번민의 시대라 아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