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준 논설위원
제정 러시아 붕괴의 두 주역은 그리고리 라스푸틴과 블라디미르 레닌이다. 라스푸틴에 의한 ‘체제 타락(regime corruption)’을 레닌이 ‘체제 붕괴(regime collapse)’로 이끈 것이다. 두 사람은 각각 1869년, 1870년생으로 한 살 차이다. 그러나 성장 배경과 삶은 정반대다. 흥미로운 것은 러시아 황실에 기생했던 라스푸틴은 서시베리아 농민의 아들로서 초등학교조차 다니지 못했던 반면, 체제 타도에 앞장섰던 레닌은 중산층 출신의 변호사였다. 라스푸틴은 첫 자녀 3명이 가난과 질병으로 죽는 것을 지켜본 뒤 러시아 정교회 계열 신비주의 종파 수도승이 됐고, 레닌은 친형 알렉산드르가 차르 암살 미수 사건으로 처형된 이후 직업 혁명가가 된다.
약초를 캐며 도를 닦던 라스푸틴은 질병 치료로 명성을 얻게 된다. 그러던 중 황태자 알렉세이의 혈우병 문제로 절망하고 있던 황후에게 소개된다. 그리고 신통력(?)을 발휘, 황태자의 병세를 호전시킨다. 아니 호전된 것으로 믿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그 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고위직 인사권을 주무르고, 궁중 귀부인들을 농락한다. 심지어 군(軍) 인사와 작전까지 개입,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군 참패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마침내 1916년 12월 유스포프 대공을 중심으로 러시아 귀족들이 황실을 보호하기 위해 라스푸틴을 암살한다. 미인계로 유혹한 뒤 청산가리가 든 과자와 포도주를 먹이고 총을 난사한 뒤 강에 던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듬해 2월혁명으로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하야(下野)한다. 훗날 볼셰비키에 맞서 싸웠던 ‘백계(白系) 러시아’의 대표적 군주주의 정치철학자인 이반 일린조차도 당시엔 2월혁명을 지지했다. 문제는 레닌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소수파 정치세력이었던 볼셰비키가 권력 공백을 틈타 10월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지금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온 나라가 어지럽다. 최태민·최순실 부녀는 한국판 라스푸틴으로 비유되고 있다. 이들에 의한 ‘체제 타락’은 하루속히 극복돼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이 한국판 레닌에게 ‘체제 붕괴’로 활용되게 방치해선 안 된다. 정치적 위기와 도전은 지금부터다. 70년간 ‘라스푸틴의 저주’에 빠져 있었던 러시아 역사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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