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문 2016.11.08 03:38
누가 묵혀 둔 책 있거든 좀 보내 달라기에 책장을 살핀다. 이사할 때 작심 방출을 하지 않고서야 차곡차곡 탑으로 쌓이는 책이다. 켜켜이 먼지에 발목 잡힌 책들이 오늘따라 딱하다. 게으름에 건망증까지 보태졌으니 더러는 언제 내 손으로 샀나 싶은 것도 있고.
아끼던 책을 팔아 쌀독을 채우고는 몇 날을 속 끓였다던 옛 문사들 생각이 난다. 책을 되찾아 오느라 어깻죽지 빠지게 잡글을 썼다는 글꾼도 있었고.
책 귀하지 않은 지금에야 지어낸 이야기들 같다. 우리 집 대문에 헌책방에서 갖다 붙인 스티커는 숫제 통사정이다. 쓰레기장에 거저 내버리지 마시라, 후하게 쳐줄 테니 곱게 넘겨 주시라.
욕심껏 사들이고는 한 달째 겨우 앞장만 쏘삭거린 새 책들이 여럿이다. 볕을 쫓아다니며 온종일 책만 봤다는 옛날 간서치(看書癡). 이름 높은 어느 책 바보는 좋은 책을 만나면 신이 나서 끙끙댔다가 갈까마귀 우는소리도 냈다가 그랬다는데.
책 바보 흉내 내기는 당분간 또 글러 먹었다. 앞마당 구석에 은행잎 쌓이는 소리, 내 귀에는 하루 종일 천둥소리. 기껏 요 몇 줄 적으면서 한나절은 더 가을바람에 놀아났다. 이런 바보가 없다.
황수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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