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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히 이어가는 마을의 전통, 그리고 오래된 향나무 한 그루

바람아님 2016. 11. 3. 23:41
조선일보 2016.11.03. 04:02 

[노은주·임형남의 골목 발견] 서울 '능동'
능동이라는 동네 이름을 이야기하면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어린이대공원이 있는 동네라고 부연설명을 하면 대부분 금세 알아들을 것이다. 사실 어린이대공원은 서울 광진구 능동 전체 면적의 3분의 2 정도를 차지한다.

어린이대공원은 놀이시설이 변변치 않던 시절,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이었고 전국의 어린이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던 곳이었다. 1973년에 개장했을 때는 놀이기구들뿐만 아니라 동물원도 있었다. 봄이면 만개하는 벚꽃 구경을 위해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기도 했다. 물론 나도 그 대열에 끼어들고 싶어 안달했고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그곳에 놀러 갔다. 한옥 대문을 넘으면 여기저기 숨겨져 있는 스피커에서는 경쾌한 동요가 흘러나왔고, 부모들의 손을 잡고 가벼운 걸음으로 뛰어다니는 아이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지금은 세월이 많이 흘러 훨씬 다양하고 좋은 시설을 갖춘 곳이 여기저기 많이 생긴 데다가 어린이들의 기호가 많이 바뀐 탓에 한적한 곳이 되었고. 그곳에 가면 좋기는 한데 왠지 늦은 오후의 햇살처럼 많이 색이 바래고 스산한 느낌마저 들었다.

사실 나도 그곳이 능동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얼마 전 어린이를 위한 일을 하는 국제단체의 일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곳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이야기를 통해 색을 입히는 작업을 하면서 어린이대공원을 오랜만에 찾아간 것이다.


능동이라는 동네의 이름은 예전에 왕비의 무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울에는 왕이나 왕비의 능이 있던 동네가 많이 있다. 문정왕후가 잠든 태릉이 있는 공릉동이 그렇고, 정동이 그렇고 능동이 또한 그렇다. 그런데 정동과 능동에는 지금은 능이 없고, 단지 능이 있던 기억만 남아 있다.


서울시청 건너편, 서울 한가운데 있는 정동에는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의 묘인 정릉이 있었다고 한다. 태조가 사랑하는 부인의 묘에 자주 들르고자 경복궁에서 가까운 곳에 안장한 것인데 소란 끝에 왕위를 물려받은 태종 이방원이 계모인 신덕왕후의 묘를 정동에서 국민대 근처인 지금의 정릉으로 옮겨버렸다. 그리고 능의 석물들은 청계천 다리로 써버리는 바람에, 정릉이라는 이름에서 정(貞)자만 남아 있다.


정릉이 조선을 연 첫 번째 왕의 부인이 묻힌 곳이라면, 능동은 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순종의 비, 순명왕후 민씨가 묻힌 곳이다. 33세에 세상을 떠난 순종의 비를 장사지내고 나서, 이곳에 묘를 만들어 유강원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러다 순종이 승하하자 당시의 법식대로 합장하기 위해 미금시 금곡에 있는 유릉(裕陵)으로 옮겨가 합장하였다고 한다.

정릉에 대한 기억이야 시간이 하도 오래되어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지만, 유강원의 경우는 불과 100여 년 전의 일이라 여러 가지 기억과 흔적이 남아 있다. 지금도 어린이대공원에 가면 유강원에서 왕비의 능 옆에서 시립하였던 석물들이 마치 퇴역한 군인들처럼 서 있다.


당시 최고의 석수들이 한껏 솜씨를 뽐내며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되는 석물들이지만, 보통은 돈후한 인상으로 서 있는 왕릉의 석물들과는 달리 좀 더 인간적인 표정으로 새겨져 있어 마치 조선이 끝나는 시점에 살았던 조선 사람의 마음으로 읽힌다. 또한 한때 능을 지키느라 거주하던 참봉(參奉)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의 기세가 당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지금은 그저 능골이라는 이름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 능골의 자부심은 일제 강점기에 이곳이 골프장으로 변하며 덧없어진다. 총독부의 고관이나 조선인 귀족들이 즐기기 위해, 몇 년의 공사 끝에 1929년에 18홀짜리 골프장이 만들어진다. 논과 밭 사이에 푸른 초원을 만들어 꼴도 보기 싫은 밉상들이 한가로이 골프를 치는 풍경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골프장은 십 년 넘게 운영되다가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던 1941년 골프 금지령이 내려지며 없어지고, 이곳은 다시 빈터가 된다. 그리고 해방 후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병사나 장교들이 즐길 오락거리가 없어 일본으로 휴가를 간다는 말을 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에 다시 골프장을 만들게 했다고 한다. 이번에는 일본인 대신 미국인들이 골프를 치기 시작하다가 한국인 관리나 기업가들이 애용하는 장소가 된다. 그렇게 20년 정도 운영되다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어린이 대공원으로 변신하게 된다. 참으로 기구한 땅의 팔자다.


그 사이 이곳은 근처에 대학이 두 군데나 들어서고 길도 넓어지고 주택단지가 들어섰다. 이제는 이곳에 능이 있었고 골프장이 있었고 논이며 밭이 있었던 기억은 아스라이 사라지고, 녹지가 풍부해 살기 좋은 동네로 변해 있다.

어린이대공원과 주택가가 맞붙은 경계 부근 골목에 치성당이라는 곳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대부분의 마을에서 사라진 동네 행사가 지금도 정기적으로 열린다. 그것은 '동제'라는 고유의 마을 행사인데, 일 년에 두 번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마을을 지켜주는 동신(洞神)에게 제사를 지낸다.


동제는 보통 농사가 시작되는 음력 2월과 한 해 농사가 마무리되는 음력 10월에 지내는데, 이제는 시골에서도 지내는 곳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서울처럼 사람들의 거주 연한이 짧고 공통분모가 별로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에서는 참 보기 어려운 행사인데, 이곳 능동에서는 일 년에 두 번 거르지 않고 거행한다고 한다.


능동의 동제는 그 자리에 450년이나 서 있는 오래된 향나무 부근에서 치러진다. 그 나무는 동네가 지난 백 년 동안, 아니 그보다 더한 시간 동안 땅과 거기 사는 사람들이 무수히 변해온 모습을 모두 한 자리에서 묵묵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오래된 향나무 한 그루와 유강원의 석물과 더불어 마을의 전통을 지키는 동네 사람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능동의 과거 기억들과 현재의 시간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