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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문화 기행] (8)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비 내리는 '물의 도시'

바람아님 2013. 8. 8. 18:10
 바로크 시대 화가들의 빛과 어둠을 보다
유쾌한 초상화로 명성얻은 할스, 시대 흐름 못따른 그의 말년은…
도심 곳곳엔 홍등가·印尼 식당…외항선원들 욕망·아픔 뒤엉켜                


오전 내내 부슬비를 맞아 다소 짜증스러운 기분으로 들어선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그러나 알량한 불쾌감은 한 점의 초상화

앞에서 봄눈 녹듯 사라졌다. 프란스 할스의 '유쾌한 술꾼'을 보는 순간 누구한테 옆구리라도 찔린 것처럼 파안대소하고 말았다.

그림 속의 사내는 관객을 향해 유쾌한 웃음을 던지고 있다. 눈은 반쯤 풀린 듯하고 양 볼엔 홍조가 뚜렷하다. 콧수염과 턱수염도

마치 술에 취한 듯 흐트러져 있다. 그 모습은 보는 이에게 웃음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마력을 지녔다.

 

챙이 넓은 검은색 모자와 레이스 장식의 누런 제복을 걸친 것으로 보아 그는 아마도 민병대의

장교인 듯하다. 왼손에는 맥주잔이 들려 있어 이 장교는 이제 막 근무를 마치고 한잔 걸치면서

알딸딸한 취기를 만끽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즐거움은 풀어진 눈매에서뿐만 아니라 혀 꼬인

소리를 쏟아내면서 움직이고 있는 오른손의 제스처에서도 읽혀진다.

이 초상화를 그린 할스는 렘브란트와 함께 바로크시대 네덜란드 인물화를 대표하는 화가로 그는

식민지 경영을 토대로 일궈낸 새 시대의 영광과 그늘을 함께 맛봤다. 당시 네덜란드는 세계

각지에서 들여온 엄청난 물자를 바탕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부를

축적한 시민계층은 그림과 꽃으로 집을 아름답게 꾸미기 시작했다. 그림을 구매할 수 있는 저변이

확대돼 화가들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자본주의와 합리주의에 토대를 둔 공화국 시민들은 권위적인 구교를 배척하고 캘비니즘을 신봉하고,검소함을

미덕으로 여겼던 청교도 지도부는 신의 형상으로 교회를 장식하는 것을 금지했다.

시장의 확대는 화가들에게 보다 많은 부를 축적할 기회를 제공했지만 그것은 불안정한 기회였다. 안정적 수입을 가져다준

교회 주문의 소멸은 화가들을 생존 경쟁의 체스판으로 내몰았다. 시민계층의 기호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이제 종교적

테마에서 벗어나 현세적 주제로 눈을 돌려야 했다. 또 시민들의 다양한 기호를 한 작가가 모두 충족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에

화가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전문적 장르를 개척해야만 했다.

한때 잘나가던 화가라도 대중의 기호를 읽어내고 그 흐름을 선도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빈곤의 나락으로 추락할 수 있었다.

정상급 초상화가 렘브란트는 주문자의 요구를 무시한 채 작품성에만 매달리다 대중의 외면을 받아 말년을 빚 독촉과 빈곤

속에서 보내야 했다.

할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서민풍의 가식 없는 유쾌한 인물화로 한때 큰 인기를 모았지만 귀족적 세련미를 추구하는

반다이크풍 초상화의 출현과 함께 유행에 뒤떨어진 촌스러운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취급받게 된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할스는 우수에 젖은 듯한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등을 돌린 고객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그는 부인의 바가지 속에 술로 마음을 달래며 양로원에서 처량하게 말년을 보내야

했다. 그의 삶은 자신이 그린 '유쾌한 술꾼'만큼 유쾌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할스의

초상화에는 이처럼 전성기 네덜란드 시민사회의 양지와 그늘이 함께 투영돼 있다.

17~18세기에 구축된 도시의 기본 골격을 지금까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물의 도시'

암스테르담은 방문객을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자유를 구가하던 400년 전의 시민사회로

안내한다. 에이만(灣)을 향해 알파벳 'C'자를 여러 겹 포개 놓은 듯한 도시 구조는 배를 통한

물자수송의 편리함을 추구한 결과였다. 부두에서 하역한 후 수레로 따로 옮길 필요 없이

원하는 장소에 바로 닿을 수 있게끔 크고 작은 운하를 건설했던 것이다.

과거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운하와 운하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들이 건설돼 거주자의

교통수단이 배에서 트램과 버스로 바뀐 정도다. 그 부채꼴 도시의 중심에 암스테르담 중앙역이 자리하고 있다. 당연히 자유의

도시 엿보기는 이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멋진 기차역에서 시작하는 게 편리하다.

전성기 암스테르담의 흔적은 아직도 도시의 중심에 선명히 남아 있다. 바로 홍등가와 식당가다. 오랫동안 가족과 헤어져 있어야

했던 외항선원들에게 생리적 욕구와 음식만큼 절실한 것이 또 있었을까. 그래서 홍등가는 오스테르 부두에서 도보로 불과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이 얼마나 솔직하고 합리적인가. 홍등가는 도시의 번영과 함께 갈수록 확대돼 나중에는 구교회를

에워쌀 정도였다.

식당가는 홍등가와 연결돼 있는데 눈에 띄는 것은 인도네시아 식당이 많다는 점이다. 이 역시 인도네시아를 거점으로

동인도회사를 운영했던 과거의 역사를 생생히 증언하는 살아있는 증거물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전성기 암스테르담 시민사회의 속살을 엿보기 위해서는 트램이나 뮤지엄보트를 타고

국립미술관,반 고흐미술관,시립미술관이 모여 있는 뮤지엄광장으로 가야 한다. 그 아트벨트 중심에

 120여개의 전시실을 갖춘 국립미술관(현재 리노베이션 공사로 부분 개관 중)이 자리하고 있다. 베르메르의

'우유 따르는 여인',렘브란트의 '야간순찰대',헤다의 '도금된 술잔이 있는 정물화' 같은 명품들을 대하며

우리는 현세의 삶을 예찬했던 17세기 암스테르담 사람들의 여유만만한 정신을 만난다.

할스의 '유쾌한 술꾼'은 그러한 유쾌한 삶의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한 일종의 스냅사진이다. 그림을 보며

술꾼에게 말을 건넨다. "여보게 나도 한잔 주게나. "

정석범 미술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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