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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문화 기행] (7) 스위스 제네바‥순례자가 북적이는 카페에서 마리아를 본 순간 '불꽃' 이…

바람아님 2013. 8. 7. 09:29
 완전한 사랑을 이루는 무대
코엘류 소설 '11분' 강렬한 첫 만남과 마지막 사랑의 장소
거리 곳곳 안내판엔 산티아고로 가는 길…삶의 방향 상실한 지루한 고통의 은신처
               

화가가 여자에게 말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천지창조 초기의 인간은 오늘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고.그것은 마치 서로 다른 두 존재가 등을 마주 댄 듯한 형상으로 하나의 목에 얼굴은 앞뒤로 두 개였으며 팔 다리는 네 개이고 성기는 둘로 암수한몸이었다고.

화가는 덧붙인다. 이 태초의 존재는 얼굴이 두 개라 번갈아 자면서 쉬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었고,다리가 네 개여서 훨씬 적은 힘으로 오래 서 있을 수 있었다고.게다가 이들은 양성이라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번식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들에겐 위험한 존재로 비쳤으며 결국 제우스신은 벼락을 던져 그 피조물을 남자와 여자 둘로 쪼개버렸다고 설명한다. 이 때부터 남자와 여자는 본래의 활기를 잃고 방황하게 됐고 오직 육체적 결합을 통해서만,즉 태초의 자웅동체 상태가 돼야만 예전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파울루 코엘류의 소설 《11분》(2004년 문학동네에서 번역출간됐다)은 연예인의 꿈을 품고 제네바에 왔다가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몸을 파는 일에 빠져들게 된 한 브라질 여성을 통해 진정한 성(性)이란 무엇인가를 곱씹어보게 하는 작품이다.

매춘을 통해 번 돈으로 고향에 돌아가 농장경영의 꿈을 키워가던 주인공 마리아는 어느 날 도서관에서 빌린 농장경영에 관한 책을 읽기 위해 한 카페에 들어간다. 그 곳에서 장차 자신의 운명을 바꿔놓을 한 남자와 마주친다. 카페에서 노벨상 수상자의 초상을 그리던 랄프 하르트라는 유명화가가 접근해왔던 것이다.

스물아홉의 나이에 벌써 두 번이나 이혼한 채 사랑에 흥미를 잃고 오로지 그림에서만 위안을 얻고 있던 이 화가는 마리아를 본 순간 그녀에게서 번쩍이는 구원의 빛을 봤다. 자신에게 정신과 육체가 결합된 완전한 사랑을 가져다줄 여신을 발견한 것이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서로가 각자의 잃어버린 반쪽임을 예감한다.

둘은 카페에서 나와 순례객들로 북적대는 '산티아고의 길'을 거닐며 속내를 털어놓는다. 9세기에 예수의 제자인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되어 최고의 성지가 된 스페인의 산티아고 델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이 험난한 길은 1000년이 넘은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고뇌와 땀방울이 스민 구도의 길.삶의 방향을 상실한 어린 양들은 이 지루한 고통의 길 위에서 신과 스스로에게 삶의 길을 물었다.

스위스는 중세시대 이래 동구와 북구,남부 독일 순례자들이 산티아고 델 콤포스텔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었다. 이들이 지나는 스위스 루트의 왼편에는 프랑스와 등을 맞댄 쥐라고원의 고봉들이 있고,오른쪽에는 이탈리아 북부와 맞닿은 알프스의 만년설이 자리해 순례자들을 성지로 인도하는 거대한 랜드마크가 됐다.

스위스 루트는 독일 접경인 보덴 호반의 도시 콘스탄츠에서 시작해 루체른과 베른(인터라켄을 경유하는 방법도 있다)을 거쳐 레만호 북단의 로잔에 도달하게 되고 여기서부터 호수의 좌안을 따라 내려와 제네바에 이르게 된다.

생 제르베 광장에서 론강을 가로지르는 마신느 다리를 건너면 벨 에르 광장이 나오고 시테 거리와 그랑 거리를 거쳐 시청사 거리에 이르면 생 피에르 대성당의 첨탑이 순례자를 반긴다. 순례객들은 여기서 주교의 축복을 받고 하룻밤을 묵은 후 프랑스 국경을 넘는다.

마리아와 랄프가 사랑을 키워가는 여정도 바로 이 산티아고의 길 위에서 이뤄진다. 그들이 제네바의 거리를 산책할 때마다 산티아고의 길을 가리키는 안내 푯말은 마치 신의 계시처럼 그들 주위를 맴돈다.

한 영국인 남자를 통해 감각적인 쾌락에 빠져드는 마리아에게 랄프 하르트가 육체적 고통도 쾌락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점을 깨우쳐준 장소인 영국공원은 순례길 길목에 있고,둘이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 출발점이 된 호텔은 산티아고의 길 쪽으로 창이 난 곳이었다.

마리아가 브라질로 떠나기 전 랄프와의 마지막 만남 장소로 선택한,그러나 결국엔 영원한 결합을 축복하는 장소가 된 생 피에르 대성당은 순례자들의 안식처였다.

부활절 휴가 기간에 방문한 제네바의 첫 인상은 요조숙녀의 단아함 그 자체였다. 레만호의 쪽빛 물결,좌우로 병풍처럼 둘러선 쥐라고원과 몽블랑의 만년설,그 사이에 둥지를 튼 단정한 고풍의 건물들이 자아내는 서정적인 풍경은 방문객들에게 커다란 위안을 준다. 뿐만이 아니다. 이곳의 친절한 인심은 왜 스위스가 세계 최고 관광대국이 될 수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마신느 다리 위에 자리한 관광안내소는 방문객에게 이 도시와 어떻게 사랑에 빠질 수 있는가를 가르쳐준다. 테마별 관광포인트를 자세히 안내하는 팸플릿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있는 방문객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숙소를 못 구해 발을 동동 구르던 나를 위해 미소를 잃지 않고 수십 통의 전화를 걸어준 한 안내원의 친절 또한 잊을 수 없다.

코엘류는 말했다. 인간의 원죄는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암수 딴 몸이 된 채 혼서 삶을 헤쳐 나가야 하는 두려움 앞에 선 이브가 그러한 마음의 동요를 아담과 나누려 했다는 데 있는 것이라고.'요조숙녀' 제네바는 이미 그러한 진리를 터득한 것일까.

이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는 그 친절함과 넉넉한 인심으로 방문객이 갖고 있을지도 모를 미지의 두려움을 함께 나눌 준비가 되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코엘류가 제네바를 구원의 무대로 삼은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정석범 미술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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