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기독교 문화 흡수했던 톨레도…건물곳곳 흔적 남아
중세시대 '불온사상'…아리스토텔레스 철학도 르네상스 시대로 전승
라이문도 대주교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채 톨레도 대성당의 도서관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지금 호학의
군주인 알폰소 10세의 후원 아래 고대에 폐기됐던 금단의 저술들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총지휘하고 있다.
도서관에서는 유대인,무어인(아랍인),기독교인 학자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번역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테이블 위에는
무어인들의 손에 넘어간 톨레도를 탈환했을 때 발견한 그리스 저작의 아랍어 필사본이 수북이 쌓여 있다. 지금 학자들이
번역에 열중하고 있는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다.
라이문도는 얼마 전 라틴어 전문가 군디살보에게 이 책의 번역을 요청했는데 군디살보는 이를 위해 아랍어에 능통한
아벤데우스를 데려와 함께 번역에 착수했다. 번역은 아벤데우스가 아랍어 필사본을 스페인 중앙어인 카스티야어로 번역하면
군디살보가 이것을 다시 학술어인 라틴어로 옮기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초역이 이뤄지면 그리스 철학에 정통한 학자가 그
내용을 감수했다.
우리에게 친숙한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그러나 서양의 중세 1000년간 그것은 저주받은 이름이었다.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될 금기의 단어였다. 플라톤과 함께 그리스 철학의 한 축을 이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플라톤의 사상이
기독교 신학에 부분적으로 수용됐던 데 비해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설파한 '불온한' 내용 때문에 중세 초기 이단으로 낙인 찍혀
모조리 불태워졌다.
이른바 유럽판 분서갱유에서 살아남은 극소수의 서적만이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취급된 것처럼 수도사들
사이에 전해올 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불온한 책들이 기독교 왕국에서 버젓이 번역될 수 있었을까. 그것도 스페인의 영적 중심인 톨레도 대성당의
천장 아래에서 말이다. 그 배경을 이해하려면 톨레도 문화와 이곳 기독교의 포용성을 알아야만 한다. 사실 그러한 관용의 전통을
만들어 놓은 것은 침략자인 무어인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와 배치되는 그리스의 인간적 문화를 배척하지 않고 유일신교
의 교의 아래 재해석했다.
특히 그리스의 과학적 유산은 발전적으로 계승돼 기독교인 의사들이 아직도 연금술사처럼 주문을 외우고 두꺼비와 도마뱀으로
정체 불명의 탕약을 끓이고 있을 때 무어인 의사들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과학적 치료를 시행하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무어인들은 자신들의 지배 아래 놓여 있던 비회교도,특히 유대교도와 기독교인들이 납세 의무를 이행하고 이슬람교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한 그들이 정치,무역 및 지적 활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한 관용이 있었기에
무어인들은 큰 반발 없이 기독교인들을 수백년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기독교도들이 이곳을 탈환한 이후에도 오랜 기간 지속됐다. 그들은
무어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도 그리스와 이슬람교의 유산을 기독교의 우산 아래 통합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자신감이 알폰소 10세와 라이문도가 금서의 번역이라는
'큰일'을 저지를 수 있는 토대가 됐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잠자던 숲속의 아리스토텔레스는
1000년의 꿈에서 깨어나 서유럽 세계에 인문주의의 부활,곧 르네상스라는 화려한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이런 화합과 관용의 정신은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건축물과 예술품 속에 짙은 흔적을
남겼다. 타호강을 허리에 두른 천연의 요새 톨레도에서 처음 마주치는 산티아고 델 아라발
성당은 첫눈에 농밀한 아랍 문화의 향취를 전해준다.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진 벽돌과 장식적 채색타일 사용 등 전반적으로 아랍 건축의 특징이
두드러지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말굽쇠형 아치로 출입문과 실내 기둥을 장식,고대 스페인
건축의 전통을 결합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스페인 양식과 아랍 양식이 혼합된 절충
양식을 '무데하르 양식'이라고 부르는데 도시 곳곳에서 이러한 절충 양식의 건물을 발견할 수 있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으로 유명한 산토 토메 성당,유대인 교회인 산타 마리아 라 블랑카 교회,고딕-무데하르-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산 후안 데 로스 레예스 수도원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톨레도의 문화적 개방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엘 그레코의 존재다. 원근법을 무시하고 인물들을 기형적으로
길게 묘사한 이 그리스 출신의 이탈리아 화가를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후원한 이곳 지도자들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화가의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은 특히 그의 인물 묘사에 잘 드러나는데 우리는 그 점을 톨레도의 중심인 소코도베르 광장에
인접한 산타크루즈 미술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2층 전시실을 가득 메운 그레코의 인물들은 구릿빛 피부에 짙은 눈썹과 검은
눈동자를 하고 있어 아랍인과 유대인의 인종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역시 서유럽에서 볼 수
있는 하얀 피부가 아니라 마치 선탠을 한 듯 구릿빛 피부에 무어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그림을 주문한 교회는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문화적 총체였던 것이다. 스페인 문화에서 풍기는 독특한 이국 정서와 매력은 그러한 개방성의 산물이다.
그레코의 작품을 뒤로 하고 고고학 전시실로 발길을 옮기는데 뜻하지 않게 아라비아풍의 정원이 나타난다. 회랑의 말굽쇠형
기둥과 2층 난간의 아라비아식 장식이 돋보이는 사각의 정원을 바라보는 순간 귓전에 하나의 익숙한 멜로디가 울려퍼진다.
마누엘 데 파야의 '스페인 정원의 밤'이다. 피아노라는 서구의 악기에 애조 띤 아라비아의 선율을 실은 그 음악은 눈앞에 전개된
이국적 풍경을 담아낸 것 같다.
무어인과 기독교인이 함께 만들어낸 관용의 문화는 시공을 초월해 오늘 이 낯선 방문객에게 달콤한 낭만적 환청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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