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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60세, 새로운 설렘을 향한 출발점

바람아님 2016. 11. 16. 23:30
조선일보 : 2016.11.16 03:06

예순은 삶을 재가동하는 시발점… 설렘과 흥분을 가져도 되는 나이
막연한 꿈꾸던 젊은 시절 경험한 시행착오의 스승이 방어벽 쳐줘
두 눈 부릅뜨고 자신을 응시하며 새 설계도와 리스트를 작성해야

이강원 세계장신구박물관장·시인
이강원 세계장신구박물관장·시인
지구 온난화의 탓일까. 수능 추위는 이제 옛말이 된 듯하다. 어제오늘 잠시 추웠지만 올해도 지난 몇 해처럼 수능 날은 포근할 것이라고 한다. 11월이 중반을 지나도록 초가을 같은 포근한 날씨가 이어진다. 춥지 않으니 편하기는 하지만 예전에 살을 에는 듯했던 겨울에 맛본 짜릿함은 상실됐다. 20대 초반 때는 영하 10도의 날씨에도 맨다리로 다니곤 했다. 주위에서는 염려의 시선을 보냈지만 "겨울의 쨍한 냉기를 맨살로 느끼고 싶어요"라며 한껏 호기를 부렸다. 설익은 치기(稚氣)가 불러온 돌출 행위만은 아니었다. 젊은 나는 세상이 두렵지 않았다. 하물며 추위쯤이야. 오히려 주위의 시선과 호기심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던 내 나름의 '겨울 퍼포먼스'였다.

몇 해 전 장신구 수집가인 지인을 만나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가기 위해 공항으로 가면서 불현듯 자신만만했던 20대 시절이 떠올랐다. 40년이 훨씬 지난 60대 후반에, 먼 길을 떠나며 그 시절이 되살아난 것은 연륜과 경험의 옷을 껴입은 치기가 새로운 지혜의 밑거름으로 쓰였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을까.

먼 길을 떠날 때는 항상 외지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이 그려놓은 지도 위에 지난날의 기억들이 눈처럼 내려앉곤 한다. 60여 년 걸어온 길목 어딘가에 버려져 먼지를 뒤집어쓴 채 숨어 있던 기억들이 문득 되살아나 예상하지 않았던 미소를 불러오기도 한다. 열 살도 되기 전에 세상이 너무 힘들다고 자살 흉내를 내었던 일, 여중 시절 사모하던 수학 선생님 댁을 탐정처럼 알아내 찾아갔던 일 등이 그렇다. 한때는 엄청나게 자신을 폭풍에 휘말리게 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그저 작은 흔적으로 남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이를 먹는 것이 좋다. 새로운 발견의 즐거움은 지금까지 몰랐던 것에서도 얻지만 시간이 가르쳐준, 전혀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데서 더 크게 느낄 수 있다. 더욱이 요즘의 나이는 예전과 달라서 어떻게 관리하고 디자인하느냐에 따라 그 쓰임과 차이를 스무 살 넘어까지 벌릴 수 있게 되었다.

[ESSAY] 60세, 새로운 설렘을 향한 출발점
/이철원 기자
예전의 예순 살이면 이미 뒷방 노인네가 되어 손자나 돌보며 지낼 나이였다. 요즘은 건강이나 사회의 인식도 크게 달라져서 70대 중·후반에도 자신의 커리어를 활발하게 이끌어가는 이가 적지 않다. 세상이 좋아진 걸까, 아니면 노인이 되어서도 젊었을 때 받았던 삶의 무게를 덜어내지 못한 채 그대로 짊어지고 가야 할 만큼 삶이 팍팍해진 것일까. 수명은 연장되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져서 이제는 남녀 구분 없이 은퇴 이후 삶을 설계해 놓지 않으면 경제적으로는 물론 문화적 노인 빈곤층으로 전락한다. 그만큼 절박한 문제가 되었다. 특히 여성의 경우는 예전처럼 현모양처로만 삶을 마감할 수 없게 되었다. 전업주부로 보낸 뒤에 찾아오는 허망함과 비애는 감당하기 어려운 갈등과 우울함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이제 60이라는 나이는 삶을 재가동하는 시발점이다. 새로운 설렘과 흥분을 가져도 되는 나이다. 막연한 꿈을 꾸던 젊은 시절 경험했던 시행착오의 스승들이 가까이서 방어벽을 쳐주는 든든한 나이이기도 하다. 그래서 60이 되면 꼭 한번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진지하게 응시해야 한다. 새로운 설계도와 새 리스트를 작성해야 한다. 취할 것과 버릴 것, 조금 가다듬어서 쓸 것(한때 배웠다가 중도에 포기했던 것과 자신을 들뜨게 하고 행복하게 했던 것들과의 재회, 이런저런 제약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가고 싶은 곳으로의 여행)과 새롭게 도전할 것(새 외국어 공부, 글쓰기, 그림 그리기) 등 좀 더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도전 열차에 자신을 태워야 한다.

이렇게 리스트를 작성하다 보면 모르는 곳으로 떠나는 여행길도, 새로운 계획과 맞서는 것도 덜 두렵다. 60대는 참 장점이 많은 나이다. 삶의 큰길은 물론 작은 골목길과 지름길까지 알고 있는 나이다. 멀리 보려 하지 않아도 절로 멀리 보이고 깊게 느끼지 않으려고 해도 많은 것을 깊게 흡입할 수 있는 장점을 갖춘 나이다. 크게 실망하고 당황할 것도, 환희에 들떠서 흥분할 것도, 크게 겁날 것도 줄어든 것이 참 좋다. 이미 '나는 ~살'이라는 큰 현수막이 걸린 나이, 삶의 풍경화를 표정이나 주름으로 대변할 수 있는 나이여서 좋고, 비로소 살아온 감각만으로 특별한 가이드 없이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나이여서 더 좋다. 이목구비의 조형적인 미가 평준화된 마당에 얼굴 전체에 번지는 분위기가 주는, 감동이 있는 얼굴까지 가질 수 있다면 뭘 더 바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