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문 2016.11.17 03:38
여행길의 버릇이 있다. 모르는 마을에 문득 멈춰 골목을 헤집어 걷는 것.
마당이 넘겨다뵈는 낮은 집들이 붙어 앉은 시골 동네를 걸어 본다. 시골 고샅을 느리게 걷는 맛은 안 해 보고는 모른다. 인기척이 없는데도 사람 온기는 구석구석 배어 있다. 담벼락에 가지런히 기대 말라 가는 콩대, 처마 끝마다 쪼글쪼글 매달린 곶감 대롱.
사람 사는 집, 빈집 구분 짓는 이맘때 징표는 늙은 감나무다. 우듬지에 까치밥만 남은 빈 나무는 사람 사는 집, 늦단풍보다 더 붉은 감들이 쏟아지게 꽉 찬 나무는 보나마나 빈집.
벽공(碧空)에 점점이 홍시로 전등불을 켰나 싶은 나무들은 가까이 가보면 영락없이 빈집을 지키고 서 있다. 서리 내릴세라 장대로 감부터 털던 재빠른 손길들 다 어디 가고. 가을볕 물러갈라 손마디에 감물 들도록 곶감을 깎던 집주인은 또 어디 갔을까.
어느 빈집 앞에 한참 섰다. 한시절 소란했을 대청마루, 신발들 어지럽게 굴렀을 댓돌, 삼시 세 끼 밥 냄새 피웠을 흙담 굴뚝. 누군가의 그리움일 시간들이 환청으로 쏟아지는 저녁. 나도 어서 집으로 가야지, 갑자기 걸음을 재촉하는 만추의 시간 여행.
황수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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