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2.11.11 손철주 미술평론가)
'등짐장수' - 권용정 그림, 비단에 담채, 16.5×13.3㎝, 19세기, 간송미술관 소장.
보부상은 봇짐[褓]을 들거나 등짐[負]을 진 조선시대 장사꾼[商]을 이르는 말이다. 봇짐장수는 부피가 작고 값이 비싼 품목을 팔았다. 비단이나 금은, 담비나 수달피 등이다. 등짐장수는 부피가 크고 값이 싼 어물·소금·목기·토기 등을 지고 다녔다. 장(場)이 서는 곳을 찾아 떠돌던 그들 중에는 홀아비와 부모 잃은 자식이 유난히 많았다. 처지가 딱하고 신분이 낮다 보니 보부상은 업신여김을 받았지만, 나라가 위급할 때 식량을 대어 주거나 의병이 되어 싸운 사례도 여럿 있었다.
그림의 주인공은 그릇 파는 등짐장수다. 둥글넓적하고 아가리가 넓은 자배기와 독의 뚜껑으로 쓰일 소래기 등이 지게에 얹혀 있다. 그나마 태깔이 반드레한 오지그릇이 아니다. 구울 때 솔가지를 태운 그을음이 묻어 칙칙한 질그릇이다. 등짐장수의 행색도 달리 나을 게 없다. 신들메로 발을 바짝 묶고 바짓가랑이에 행전을 친 차림새가 깔축없이 장돌뱅이다. 땅바닥에 앉아 다리를 주무르는 그의 표정이 먼 길에 지쳤다. 패랭이에 꽂아둔 곰방대에 살담배를 쟁여 한 대 피우면 저 절어 있는 피곤이 행여 풀릴까.
고단한 사내의 옆모습을 쓸쓸하게 묘사한 이는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권용정(權用正·1801~?)이다. 그는 부사(府使) 벼슬을 지낸 것 말고는 이렇다 할 행적이 없다. 등짐장수는 오라는 데가 없어도 발품을 마다치 않고 걸었다.
삶은 시름겹지만 그들의 타령은 익살맞다.
'옹기장수 옹기짐 지고 옹덩거리고 넘어간다~
사발장수 사발짐 지고 올그락달그락 넘어간다~
황아(자질구레한 일용품을 말함)장수 황아짐 지고 황똥황똥 넘어간다~
엿장수 엿짐 지고 엿근엿근 넘어간다.'
사내가 손에 쥔 작대기는 작달막하다. 끝에 쇳조각을 끼운 물미장(杖)인데, 주로 지게를 받칠 때 쓴다.
등짐장수를 유심히 보라. 짐이 무거워도 지게를 벗지 않는다. 쉬면서조차 작대기를 짚고 버틴다.
살면서 벗어던져도 될 짐이 어디 있을까.
(각주)
황아(荒-)[명사]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일용 잡화. 끈목, 담배쌈지, 바늘, 실 따위를 이른다.
끈목[명사] 여러 올의 실로 짠 끈을 통틀어 이르는 말. 대님, 허리띠, 주머니 끈, 망건당줄 따위가 있다.
물미[명사] 지게를 버티는 작대기 끝에 끼우는 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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