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34] 자기들 좋을 때 남도 좋으면 좀 좋으랴

바람아님 2013. 8. 18. 10:20

(출처-조선일보 2012.11.25 손철주 미술평론가)


비탈길이 희끗한 게 눈 내린 자취가 여태 남았다. 잔설(殘雪)을 털어버린 솔잎이 외려 싱싱하다. 남녀 한 무리가 돗자리를 펼친 채 둘러앉았다. 겨울 들판의 냉기는 아랑곳없이 그들은 지금 흥청거린다. 자리 한가운데 놓인 화로를 보니 눈치채겠다. 육색(肉色)이 붉은 고기 예닐곱 토막이 지글지글, 불판 위에서 익어간다. 갖은 야채가 소복이 담긴 접시, 술잔과 밥그릇과 종지가 놓인 개다리소반, 따듯한 국물이 들어있을 법한 탕기(湯器)가 그 곁에 나란하다. 19세기 한양 어느 모퉁이에서 벌어진 회식 장면이다.

척 봐도 남부러운 들놀이다. 가짓수는 빠져도 먹을거리로는 잔칫상에 뒤지지 않는다. 게다가 도살 금지령이 엄연하던 때다. 화로에 쇠고기를 구우며 군침 다실 정도라면 한 벼슬 꿰찬 부류가 아니고서야 어림없다. 곱게 차려입은 기생을 둘이나 대동한 처지 아닌가.


	'야연(野宴)' - 작자 미상, 비단에 채색, 76×39㎝,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은 전체 그림 중 아래쪽 일부임.
'야연(野宴)' - 작자 미상, 비단에 채색, 76×39㎝,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은 전체 그림 중 아래쪽 일부임.
이제 노는 가락을 훑어보자. 왼편에 두건을 쓰거나 남바위 차림을 한 두 사내는 털방석까지 갖췄다.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입안에 넣고 오물거린다. 탕건 바람에 쾌자를 걸친 사내는 등 돌린 기생이 건네는 고기를 입 딱 벌리고 받아먹는다. 그는 두 손에 술병과 술잔을 잡았는데, 나잇살이 어지간한데도 방석은 선심 쓰듯 기생에게 양보했다. 맞은편 붉은 저고리의 기생은 먹을 차례를 얌전히 기다린다. 이날 고기 굽는 수고는 젊은 축인 갓쟁이가 맡았다. 가랑이가 드러나게 쪼그려 앉아 젓가락으로 고기를 뒤적인다. 신발 신은 채 자리에 뛰어든 오른쪽 사내의 거동은 웃긴다. 뒤늦게 와서 고개를 빼들고 남은 고깃점부터 헤아리는데, 참 채신머리 구기는 짓이다.

먹을 게 생겨 복된 이들은 남이 눈 흘기는 줄 모른다. 저들끼리 좋아서 이런 시조가 나왔다. 
오늘도 좋은 날이요 이곳도 좋은 곳이  
좋은 날 좋은 곳에 좋은 사람 만나있어 
좋은 술 좋은 안주에 좋이 놂이 좋아라. 
바라건대, 나 좋을 때 남도 좋으면 좀 좋으랴.


(원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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