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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세 일본 노인이 매년 새벽 광화문 거리 걷는 이유

바람아님 2016. 12. 26. 23:52
오마이뉴스 2016.12.26 11:51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대표를 맡고 있는 카이 토시오씨



이 글을 쓴 주영덕 기자는 일본 구마모토에 거주하는 한국교포입니다. 이 글은 주 기자가 지난 13일 구마모토를 찾은 한국의 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학생들이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의 대표인 카이 토시오씨를 만난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를 정리한 것입니다. 카이 토시오씨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사죄하는 의미에서, 20여년 간 그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작업을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편집자말>


카이 토시오씨 (甲斐利雄)
ⓒ 심규상

새벽 4시. 서울 광화문.

88세 일본 노인이 어슴한 거리를 걷고 있다.

그는 일본 규슈 구마모토에 사는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의 대표인 카이 토시오(甲斐利雄)씨다. 그는 해마다 명성황후의 기일인 10월이 되면 일본인 방문단을 꾸려 명성왕후 묘소(경기도 남양주시 홍릉)를 찾아 일본 시민을 대신해 사죄의 글을 올리고 참배하고 있다. 20여 년 가까이 한 해를 거르지 않고 해온 일이다.


그는 구마모토현 아소(郡) 지역에서 중학교 교사를 은퇴한 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데 남은 생을 바쳐 왔다. 그의 노년을 명성황후로 이끈 것은 20여 년 전 아소산 국립공원에 놀러 왔던 한국인 소녀다. 그 소녀를 통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처음 접하고 연구와 실천을 위해 매달렸다.

그는 한국과 같은 '족보'가 없는 현실에서 시해 사건에 가담한 후손들을 일일이 찾아 나섰다. 그중 몇 명의 후손을 만나 선조들의 잘못된 행위를 알리고 사죄를 끌어내는 일에 몰두했다. 실제 그의 손에 이끌려 가해 후손들이 명성황후 묘소를 찾아 선대가 저지른 죄과를 밝히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아소 국립묘지 입구에 서 있는 한 기념비에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한 일을 '치적'으로 새겨 홍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찾아내 알려온 것도 그다.

그런데 그가 매년 서울을 들를 때마다 새벽 4시경 광화문 거리를 걷는다고 밝힌 것이다. 지난 13일 그가 구마모토를 찾은 한국의 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대학생 방문단과 만난 자리에서였다.

지난 13일, 카이 토시오씨(오른쪽)의 집 거실. 그의 거실은 명성황후 시해사건 가담자에 대한 자료로 꽉 있다. 벽에 시해사건 관계자 48명의 명단을 붙어 놓았다. 붉은 원안은 카이씨가 거주하고 있는 구마모토 출신(21명)을 표기한 것이다. 왼쪽이 필자다.
ⓒ 주영덕

재일본 한국교포인 나는 통역을 위해 간담회에 참석했다. 수십 차례 그의 통역을 해 왔으니 이제 거의 외우듯 그가 말할 내용이 머리 안에 들어 있었다. 표정과 이야기 흐름을 들으며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짐작할 수 있는 정도다. 덕분에 나도 일본 군국주의의 조선 침략사 공부를 수십 번 한 셈이다.

그런데 이날 따라 이야기가 사뭇 달랐다. 그는 시작부터 서울 광화문 새벽길을 걷는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나 또한 처음 듣는 얘기였다. 통역하면서도 머릿속에 의문표가 꽉 찼다.


'왜, 매년 새벽 4시 광화문 새벽길을 걸은 걸까?'

그가 대답하듯 다음 이야기를 이어갔다.

"약 120년 전, 48명의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기 위해 습격조를 꾸려 경복궁을 쳐들어갔습니다. 새벽 5시, 전등불이 없는 어두운 때를 틈탔습니다. 과연 군사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일반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 '어둠'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비슷한 시간 때인 새벽 4시에 광화문 거리를 걸어 보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통역하면서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수십 권의 책과 논문을 통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접하고서도 문장 하나하나를 자신이 직접 재조사하듯 확인해온 것이다.


카이씨처럼 직접 땅을 밟아가며 깊이 있게 공부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역사학자나 연구자 누가 이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할까? 카이씨의 또 다른 노력을 접하며 가슴이 뛰면서도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카이씨는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을 꾸려 약 20년 동안 시해자들의 이름과 출신지를 발로 찾아 확인했다. 그 결과를 큰 종이에 직접 새겼다. 그 종이가 뚫릴 듯 몇 백 번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도표의 밑단에 있는 당시 '일본군 3중대'에 초점을 맞춰 왔다.
카이 토시오씨가 그린 명성황후 시해 가담자 도표
ⓒ 심규상

"명성황후의 사진이 있었는지도 불명확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둠에 잠긴 그 넓은 경복궁에서 일반 일본인이 어떻게 정해진 시간 내에 시해할 수 있었을까요? 아직은 추측에 불과합니다만 사건 배후구도를 그리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카이씨는 다른 일본인들에게도 "친선우호는 먹고 즐기는 유희가 아닌 서로의 역사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일본인들에게 "한국에 가서 명성황후 묘소를 참배하거나 서대문형무소·독립기념관 등을 꼭 둘러보고 느꼈으면 좋겠다"고 당부하고 있다.


아직 그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관련해 어떤 가설을 가졌는지, 그 내용까지는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그가 121년 전 한국의 경복궁에서 일어난 일본의 채 드러나지 않은 만행을 밝히기 위한 노력을 쉬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매년 새벽, 광화문 거리를 걷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역사의 어둠을 밝기 위한 촛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카이씨가 광화문 새벽길을 걷는 심정으로 기원해 본다.

광화문의 수백만의 촛불이여! 121년 전 암울했던 이 나라의 어둠까지도 환히 비춰 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