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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FOCUS] 정유재란·대한제국…역사 속 정유년, 그 절망과 희망

바람아님 2016. 12. 30. 23:34

닭의 울음이 새벽 알리는 序曲이었듯 새로운 도전·변혁이 이어졌던 정유년
시대의 변화 읽어낼 책무 과제로 남아

매일경제 : 2016.12.30 15:4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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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했던 병신년(丙申年)이 저물어간다. 역사 속의 병신년은 한국사는 물론 세계사적으로도 분기점이 많았다. 1776년 조선에서는 개혁군주 정조가 즉위했다. 같은 해는 미국이 건국된 해이기도 하다. 북아메리카 내 13개 영국 식민지 대표들이 독립을 선언하며 아메리카 합중국이 탄생했다. 영국에선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나온 해였다. 다가오는 정유년(丁酉年)은 역사 속에 어떤 족적을 남겼을까. 붉은 닭의 해인 정유년은 힘찬 기운의 붉은 닭이 갈등과 반목을 딛고 개혁으로 새 시대의 서막을 열었던 해이다. 옛날 자명종이 없던 시절, 아침을 알리는 시계였던 닭은 십이지 중 유일한 조류로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매개체였다. 닭의 울음이 새벽을 알리는 서곡이었듯, 세상 사람들은 닭을 귀신이나 악귀 등 어둠의 존재를 물리치고 빛을 이끌어 주는 상서로운 존재로 여겼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 517년 정유년에는 신라 법흥왕 재위 4년째 되던 해로 처음으로 병부를 설치해 군제를 개혁했다. 신라 진지왕 2년, 백제 위덕왕 24년이던 577년 정유년에는 백제와 신라가 국경지대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당시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백제에서는 고승 검단 선사가 전북 고창에 동백숲으로 유명한 천년고찰 선운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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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명량대첩도 - 해군 공식 블로그 '블루 페이퍼'
가장 혹독한 시기는 1597년이었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의 해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은 임진왜란 이후 4년에 걸친 명과의 협상이 결렬되면서 재차 조선을 침공했다. 이듬해인 1598년 말까지 지속된 전쟁으로 한반도는 다시 침탈에 신음했다.

옥에 갇힌 이순신을 대신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원균은 7월 14일 일본군의 본진을 급습하기 위해 대규모 수군을 이끌고 출전했다. 하지만 이 칠천량전투에서 1만여 명에 달하던 수군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는 사람이 한 일이 아니고 실로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선조실록 1597년 7월 22일자에 기록된 선조의 말이다.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며 변명에 급급했다. 이 패배로 인해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면서 남겨진 판옥선을 수습하게 됐다. 역사적인 해전 명량대첩은 9월 16일 벌어졌다. 이순신은 판옥선 13척을 이끌고 명량 해협의 좁은 지형과 빠른 물살을 이용해 적군의 함대 300여 척을 가라앉히는 대승을 거뒀다.

승전으로 조선은 판세를 뒤집었다. 이듬해 도요토미가 병으로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했다.

애초에 전쟁의 근본 원인은 당시 일본이 조선에 명을 치는 데 동참하라는 요구를 한 것이었다. 이를 거부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명군 또한 조선을 돕겠다는 건 명목이고, 조선이 넘어가면 만주와 요동이 어려워진다는 계산으로 참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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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병자호란'을 쓴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정유재란이 있은 지 420년 만에 한국은 비슷한 역경을 맞고 있다. 정유재란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지만 근본 배경은 일본의 힘이 16세기부터 갑자기 커지자 패권국인 명나라에 도전하면서 일어난 전쟁으로 지금의 한반도 정세와 유사하다. 명과 일본이 조선을 배제한 상황에서 밀실협상을 4년간 하다 협상이 결렬되자 한반도는 다시 전쟁으로 내몰렸다."

이로부터 300년 뒤인 1897년은 대한제국이 건국을 선포한 해였다. 대한제국 고종은 초대 황제로 등극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의 수모를 겪은 고종은 이듬해 2월 환궁한 후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올렸다. 고종 31년이던 이 해에는 또 목포항이 개항했다. 목포항은 특히 일본 나가사키와 중국 상하이 중간 지점이어서 열강들의 관심이 집중된 요지였다. 일본산 면화가 이 항구를 통해 수입되고 개성 상인들이 모여들었지만, 일제시대에는 직물·곡물 공출 거점기지로 전락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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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한 고종
대한제국 수립 직후부터 독립협회와 수구파는 정체 문제로 대립했고, 1905년 을사늑약 체결,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강제 체결로 이어지면서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897년 정유년에는 나라 밖 극동지역에도 격변이 많았다. 독일은 청나라 산둥반도 칭다오의 교주만을 무력으로 점령했고, 러시아는 청나라 뤼순커우구와 다롄시를 점령했다. 열강의 각축전이 이 시기부터 시작된 셈이다.

이처럼 역사 속 정유년은 비극으로 점철됐지만 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는 "정유년은 새로운 희망의 해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유재란은 일본이 다시 침략을 했지만 극복하면서 다시 일어난 해고, 대한제국 수립도 새로운 질서를 도모했던 해라는 설명이다. 그는 "정유재란에서 승리를 하게 되는 것은 지도자보다는 백성들의 힘이 컸기 때문에 그 이후에 또 다른 조선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고, 대한제국은 상층부만의 개혁 선포였기에 나라를 뺏기게 된 것"이라며 "시민들의 힘을 바탕으로 할 때는 새로운 미래를 여는 첫해가 될 수 있지만, 그러지 않을 때는 용두사미로 그칠 수 있다는 역사의 교훈이 있다"고 덧붙였다.

한정주 역사평론가는 "두 번에 걸친 정유년의 비극은 청나라와 일본의 발전 속도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19세기에 일본을 읽지 못해 식민지배를 당했다면, 지금은 중국의 변화를 잘 읽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16세기 말과 19세기 말 모두 국제 정세를 읽고 변화에 대처하려 한 지식인이 있었지만, 조선의 가장 큰 패착은 양반 지배계급의 폐쇄성이었다고 그는 꼬집었다. 한 역사평론가는 "당쟁으로 나라가 망할 수는 없다. 당쟁이 있을 때 오히려 상호 감시를 통한 공적인 시스템이 작동했다. 반면 노론 일당 독재와 세도가문의 독재가 진행되면서 공적인 시스템이 붕괴된 것이다. 극단이 주도하는 사회는 진보든 보수든, 결코 바람직한 사회가 아니다"라면서 정치권에 '공생의 리더십'을 주문했다.

한 역사평론가는 또 "자위 능력이 없는 나라가 국제 정세 급변기에 리더십을 잃으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 된다. 이때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은 애꿎은 백성"이라며 "내년 한국의 대외적 상황은 매우 불확실하다. 트럼프, 푸틴, 시진핑, 아베 등 스트롱맨에 둘러싸이게 되고, 한반도의 외압은 커질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국민이라도 이 상황이 엄중함을 깨닫고 역사를 반추하면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사에서 또 한번의 정유년인 1957년은 미국에서 흑인투표권이 보장된 해였다. 또한 소련이 지구 궤도에 오른 첫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도전과 변혁이 끊임없이 이어진 해였다.

김준혁 교수는 "닭은 아침 일찍 일어나 새로운 날을 알리는 동물이다. 2017년은 새로운 시작은 분명하지만 이를 위해서 전 국민이 하나로 힘을 모으고, 지혜를 모으는 합의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기존의 것과 관습이라는 틀을 깨면 새로운 희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역사 속 정유년 인물들
877년 고려 태조 왕건…1417년 조선 세조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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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붉은닭"
정유년은 어떤 인물을 배출했을까. 어둠을 깨고 빛을 부르는 붉은 닭의 해는 많은 역사적 인물을 낳았다.

877년 정유년에는 고려를 건국한 1대 국왕 태조 왕건이 탄생했다. 송악의 호족 왕륭과 그 부인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그의 장수가 된 뒤 후백제와의 교전에서 거듭 승리해 전라도와 경상도 서부 지역에서 견훤의 군사를 여러 번 격파했다. 918년에는 궁예의 독단과 전횡을 문제 삼은 여러 호족과 배현경, 홍유 등 무장들의 지지로 거병해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세웠다.

1417년에는 조선의 제7대 국왕 세조가 탄생했다. 조선 왕조에서 최초로 반정(反正)을 일으켜 집권한 지도자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겨 했다. 1453년 계유정난으로 안평대군, 김종서를 죽이고 스스로 영의정부사에 올라 전권을 장악한 뒤 1455년 결국 단종을 강제적으로 왕위에서 밀어내고 왕으로 등극했다.

1537년에는 조선의 대성리학자 율곡 이이와 행주산성의 영웅 권율이 태어났다.

이이는 아홉 차례의 과거에 급제해 구도장원공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병조판서로서 여진족 이탕개의 침입을 격퇴한 후, 10만양병설을 주장해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명성을 얻었다.

권율은 왜란 당시 조선군 총사령관인 도원수로 임진왜란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행주대첩을 이끈 장군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1897년에는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 윤보선과 소설가 염상섭이 태어났다. 윤보선 대통령은 국회의원과 서울시장을 지냈고, 1960년 8월부터 1962년 3월까지 대통령을 역임했다. 한국 근대 문학의 선구자인 염상섭은 일본 게이오기주쿠대 유학 시절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되기도 했다. 귀국한 후 1920년 '폐허' 동인에 가담해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1921년 발표한 단편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한국의 첫 자연주의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동인 현진건과 함께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문학을 뿌리내린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가수 윤심덕과 한국의 새로운 남종화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는 화가 청전 이상범도 이 해에 태어났다.

[김슬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