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 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진행 중이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혜화문을 뒤로 한 채 삼선동 성곽길로 들어서면 마치 가톨릭대학교 담장이 된 듯한 성곽길을 따라 걸을 수 있다. 그런 길이 500m나 이어진다. 성곽이 마치 사유재산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보존상태는 나쁘지 않다.
가톨릭대학이 있는 혜화동은 조선시대에 백동(栢洞)이라고 불렀다. 조선 초 문신 박은의 집에 백림정(栢林亭)이라는 정자가 있어서 붙여진 동네이름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혜화문이 있는 동네라 혜화정(惠化町)이라고 했다. 혜화정에서 유래한 혜화동은 광복 후의 이름이다.
삼선동 성곽길을 따라가면 가톨릭대학 담장 성돌 몇 군데에 각자성석(刻字城石)이 눈에 띈다. 그중에 영동시(永同始)라는 각자는 충청북도 영동군의 공사시발점을 표시한 것이다. 조금 더 내려오면 홍산시면(鴻山始面)도 보인다. 그 당시의 홍산현은 지금의 충남 부여군 홍산면이다.
각자성석은 현재의 공사실명제로 공사가 끝난 후 그 구간에서 부실이 발생하면 해당 군현에서 보수를 책임진다는 표지다.
사실상 낙산구간의 축성 흔적은 대부분 세종 때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조 때 쌓았던 토성이 무너져 세종 때 다시 석성으로 교체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태조 때의 각자성석은 천(天)부터 조(弔)까지 천자문 순서에 따라 600척씩 구분했지만 세종 때는 구간마다 군현의 이름을 각자성석에 새겼다.
낙산 정상에서 바라본 낙산공원. /사진=서대웅 기자 |
◆성곽길에서 만나는 것들
낙산성곽길 언덕을 오르기 전 장수마을이 나온다. 붉은 시멘트기와지붕과 평면의 슬래브지붕, 벽돌로 쌓은 벽이 을씨년스럽다. 이곳은 한국전쟁 후 농촌에서 무작정 상경해 성곽 주변의 국공유지에 지은 무허가집들이 대부분이었다. 피난민들은 성벽을 허물어 집을 짓기도 하고 성벽이 그 무허가집의 뒷담 구실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합법성을 갖춘 집이 많아졌지만 수리를 하지 않아 누추하기는 매한가지다. 재개발도 쉽지 않다. 건설회사는 높은 건물을 지어야 채산성이 있지만 한양도성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는 서울시는 그런 처사를 방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착안한 것이 ‘주민참여형 재생사업’이다. 정비예정구역지정을 해제하고 한양도성 경관과 마을의 풍경이 조화되도록 건축 디자인, 노후 불량주택 개량지원, 주거안정화 등을 뼈대로 하는 사업이다.
큰 건설회사에 맡기지 않고 주민들이 설계부터 준공까지 직접 참여하는 재개발사업이다. 모든 소요인력을 마을 안에서 차출해 건물 하나하나를 리모델링한다는 것. 마을 안에는 어린이집, 이발소, 목욕탕, 동네슈퍼, 작은 박물관도 만들 예정이다.
말하자면 인정이 교류하는 생활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이 마을이 어떤 성과를 거둘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 사업이 성공하면 이와 비슷한 처지의 마을도 본받아 실시할 것이다.
◆들국화와 북한산
가을이면 성곽길에는 가을 들꽃이 수없이 핀다. 심은 것도 있고 야생화도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구절초·쑥부쟁이·산국 등 소담한 국화과의 들꽃이다. 가을을 가을답게 느끼게 하는 꽃들. 그것들을 그윽이 바라보면 평화와 안식의 감회에 젖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오르막길에는 막 단풍이 드는 복자기가 제철을 만나 기염을 토한다. 햇빛을 받아 투명한 단풍잎은 표백된 적색이 얼마나 황홀한 함성을 지르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가을이 더 깊어지면 길가에 심은 화살나무의 적갈색 단풍이며 흐드러지게 달린 좀작살나무의 핑크빛 열매가 사람들의 정다운 시선을 끈다.
낙산은 언덕과 같은 낮은 동산이지만 정상에 오르는 마지막 100m쯤은 꽤 가팔라서 숨이 찬다. 정상에 올라 북한산을 뒤돌아보면 손짓할 것 같은 봉우리들이 선연하다. 왼쪽에서부터 문수봉·보현봉·형제봉이 일정한 간격으로 손잡았고, 오른편 저 멀리로는 백운대·만경대·인수봉 등 삼각산이 흰 이마를 드러내 형제처럼 살갑게 키를 겨룬다.
낙산 암문. /사진=서대웅 기자 |
◆성벽의 구조
성벽의 구조를 설명해야겠다. 성벽의 몸체를 이루는 것은 체성(體城)이다. 체성 위에 낮게 쌓은 담장을 여장(女墻)이라 한다. 이것을 성가퀴 또는 성첩이라고도 하는데 아군이 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할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이다. 체성과 여장은 미석(眉石)으로 구분되며 미석은 성벽 밖으로 약간 튀어나와 성벽을 보호하고 기어오르는 적을 방어하는 역할이다.
여장의 한 단위를 '타'라고 한다. 타는 양쪽이 터진 타구에 의해 구분된다. 1타에는 활과 총으로 적을 공격할 구멍이 뚫렸는데 먼 곳의 적을 공격하기 위한 원총안(遠銃眼)과 가까운 적을 공격하기 위한 근총안(近銃眼)이 있다. 근총안은 타의 가운데에 하나씩 있어 아래쪽을 향해 급경사로 뚫렸고 수평으로 뚫린 원총안은 타의 양쪽 가에 각각 1개씩 2개다.
마지막으로 여장 위에 지붕처럼 올려놓은 넓적한 돌이 옥개석(屋蓋石)이다. 사다리를 여장에 걸치고 올라오는 적군을 떨어뜨리기 위해 이것을 성벽 밑으로 던졌다. 태조 때는 옥개석을 얹지 않았고 세종 때부터 얹었다고 한다. 옥개석 날개 밑에는 가느다란 홈이 가로로 파여 있는데 이것은 빗물이 여장으로 직접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보호장치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7호, 총무당(總武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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