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역사 속 숨은 영웅 (10)]재산 털어 굶어죽는 백성 살려낸 의인 김만덕(金萬德)

바람아님 2016. 12. 29. 23:21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역사(歷史)를 배우고 위인전도 읽지만, 길고 긴 역사 속에서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영웅들을 다 알지는 못한다.
후대에 잘 알려진 위인 외에 그동안 몰랐던 숨은 영웅들의 이야기, 이번 편은 어려운 시기에 나서서 백성을 위해 희생한 의인(義人)의 이야기다.

  • 구성·편집=뉴스큐레이션팀

조선일보 : 2016.12.29 08:48

김만덕은 그가 살았던 조선 정조시대에,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출신지인 제주도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알려졌던 인물이다. 객주를 열어 유통업에 종사하며 큰돈을 벌었고, 이후 굶어 죽어가는 제주도민을 위해 전 재산을 내놓았다. 뛰어난 사업가이자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자선가로 오늘날까지 칭송받는 김만덕은 유교 규범이 여성을 옥죄고 있던 시대에 굴하지 않고, 그 한계를 거침없이 뛰어넘은 의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만덕, 키워드로 보는 이야기


김만덕은 1739년 영조 15년에 중개상인 부친 김응렬과 모친 고 씨의 딸로 제주도 구좌읍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친은 김만덕이 12세 때인 1750년에 전라도로 장사를 갔다가 폭풍을 만나 사망했고, 모친도 당시 돌던 전염병으로 그해 사망했다. 김만덕은 졸지에 고아가 되어 외삼촌 집으로 가서 일하며 겨우 목숨을 이었는데, 외삼촌이 죽자 외숙모에게 매일 중노동에 학대를 당하다가 부자 제주 기생 월중선에게 돈 몇 푼에 팔려갔다. 월중선은 한눈에 어린 김만덕의 훤칠한 미모와 단정한 성품이 마음에 들어 기녀로 만들고 싶어 했다.

이후, 김만덕은 미모와 뛰어난 재능으로 제주도를 대표하는 기생으로 떠올랐지만, 스스로 본래 양인의 딸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기생 생활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제주 판관 부인에게 물심양면으로 청을 넣어 남편인 제주 판관을 움직이게 했고, 10년 만에 기적(妓籍)에서 제명될 수 있었다. 24세에 양인이 된 그는 결혼도 마다하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12세에 고아가 된 후 기생의 수양딸로

관습을 뛰어넘어 장사를 시작하다
그는 '물산객주'를 열고 그곳에 출입하는 상인들을 통해 물건의 유통 과정을 익혔다. 전라도에서 쌀과 무명 등을 사들이고 제주도의 특산물인 약재, 전복, 재목, 갓 등을 전라도에 팔았다. 때로 변동하는 물가를 잘 이용하여 많은 이익을 남겼고, 한라산에 많던 사슴을 이용한 녹용 장사와 난초 재배에도 손을 대 큰 이익을 남겼다. 세월이 흘러 그는 제주도에서 손꼽는 대상인이 되었다.

전 재산을 털어, 제주도민들을 살려내다
1794년 가을, 정조시대 제주도민들이 계속되는 재해로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제주도에 태풍이 휩쓸고 지나가 추수를 앞둔 제주도의 모든 것을 앗아 갔다. 조정에서 보낸 구휼미가 풍랑에 침몰하는 불상사까지 겹쳤고, 온 섬에 굶어 죽는 자가 즐비했다. 백성을 구제하는 곡식을 전라도에서 실어 왔지만, 턱없이 모자랄 뿐이었다. 양식을 나누어 주지 않으면 수천 명이 그대로 굶어 죽을 판이었다. 이때 김만덕은 자신의 재산을 기꺼이 내놓았다. 그는 유통업으로 모은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육지에서 쌀 500섬을 구입해 제주도민들을 살려냈다.

/김만덕 기념관 홈페이지

김만덕은 정조의 포상(褒賞)으로 금강산 유람을 마친 뒤에는 다시 제주도로 돌아가 객주 일을 계속했고,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양아들을 들여 키웠다. 1812년에 고향 제주에서 74세로 세상을 떠났고, 유언으로 양아들의 기본 생활비를 제외한 모든 재산을 제주도의 빈민들에게 기부했다.

가난한 집안 출신에 전직 기생이었던 독신 여성을, 당시 남성중심의 사회를 살던 사대부들이 앞다투어 칭송했다. 이렇게 김만덕이 전국적인 화제의 인물이 된 것은 그가 객주를 운영하면서 제주도 물품과 육지 물품을 교역하는 유통업을 통해 막대한 부(富)를 이루었고, 그 부를 기근에 시달리는 제주도민을 살려내는데 쾌척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굶어죽는 제주도민 위해 전재산 수백억원 기부한 거부

정조 시대, 벼슬에 오르다
김만덕의 기민 구호 소식은 제주 전임 목사*였던 유사모에 의해 조정에도 전해졌고, 당시 왕이었던 정조가 제주 목사를 통해 소원을 물으니 김만덕은 "서울에 한 번 가서 왕이 계신 곳을 바라보고, 이내 금강산에 들어가 일만이천봉을 구경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정조는 김만덕을 불러 명예 관직인 '의녀반수(醫女班首)'*에 봉하고, 금강산 유람을 하고 싶다는 청도 받아들였다.

기생 출신 양인이 왕을 알현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고, 이 때문에 당대 지식인이자 정치인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채제공은 김만덕의 생애를 다룬 '만덕전(萬德傳)'을 집필했고, 정약용 같은 실학자와 김정희, 조수삼 같은 문인들도 김만덕의 구호 사업을 칭송하는 시와 글을 남겼다.

* 제주 목사(濟州 牧使): 형옥·소송의 처리, 부세의 징수, 군마(軍馬)의 고찰, 왜구의 방비 등 제주 지방에 대한 모든 행정을 집행하였던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관직.

* 의녀반수(醫女班首): 내의원(內醫院)에 속한 여의(女醫) 가운데 으뜸.


김만덕, 알아봐 준 사람들

'만덕전' 지으라 특명 내린 정조
당시 사회경제 개혁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정조는 김만덕의 삶을 널리 알려 자신의 개혁 의지를 밝히고자, 신하들에게 김만덕 전기를 집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왼쪽부터) 정조 어진, 채제공, 번암집 /김만덕 기념관

채제공이 번암집(樊巖集)에 기록한 만덕전

정약용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기록된 김만덕

(왼쪽부터) 정약용, 여유당전서, 박제가, 정유각집 /김만덕 기념관

박제가가 '정유각집(貞蕤閣集)'에 기록한 김만덕


김만덕, 전 재산을 바친 애국(愛國)

* 행수기생(行首妓生): 조선시대 때, 관아에 속한 기생의 우두머리.

김만덕, 후대의 이야기

김만덕 기념관

제주도에서는 1976년 제주시 건입동의 모충사 경내에 김만덕 기념관을 만들었고, 1980년부터 매년 탐라문화제 개최일에 맞추어 만덕제라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2004년에는 김만덕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어 국내외 소외 계층들에 대한 지원과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2010년에는 KBS에서 김만덕의 일생을 거상 김만덕이라는 사극으로 각색해 방영하기도 했다.

-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산지로 7
- 문의 : 064-759-6090

* 내용 참고, 사진=장대성 칼럼, 김만덕 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