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크리스마스, 10여 년 만에 하늘공원을 찾았다. 한강 노을을 구경할 요량이었다. 탐방안내소 앞에 예전에 보지 못했던 빨간 우체통이 놓여 있다. 이름하여 ‘느린 우체통’이다. 그런데 독특하다. 1년에 두 번, 설과 추석 전후에 발송된단다. 탐방소에 들러 엽서 한 장을 얻었다. 새해의 건강과 안녕을 비는 몇 글자를 적어 집으로 띄웠다. 다음달 28일이 설날이니 아마도 2월 초에 받아볼 듯하다.
우체통에 옆 설명문이 눈에 띄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디지털 사회에 기다림의 의미를 되새겨준다’고 했다. 한가한 적이 거의 없는 한국 현대사지만 올 연말만큼 바쁘게 돌아간 적도 드문 것 같다. ‘나라 같지 않은 나라’에 대한 절망만큼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이 솟구쳤다. 한 달 뒤 설날께는 사정이 나아질까. 그다지 기대는 걸지 않는다. 반면 그 여느 해보다 기다림의 뜻이 절실하기만 하다.
며칠 뒤면 정유년, 닭의 해다.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이육사의 ‘광야’)라는 외침에서 새날에 대한 희망을 품어본다. 민의를 짓눌렀던 구(舊)체제를 청산하라는 목소리로 들려온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쓰레기 산이었던 난지도를 시민들과 함께하는 생태공원으로 부활시킨 지혜도 생각해 본다. 연인원 800만 명을 불러들인 광장에 쓰레기 하나 남기지 않은 우리다.
종교지도자들의 신년 메시지가 최근 잇따랐다. ‘낡은 것 버리기’(천주교 염수정 추기경), ‘내 삶의 주인공’(조계종 자승 총무원장), ‘권력 불균형 해소’(한기총 이영훈 대표회장) 등 개혁의 2017년을 기원했다. 때마침 새해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500주년을 맞는 해. 타락한 로마가톨릭에 대한 회개가 먼 옛날 서양에 그칠 일은 아닐 터다. 루터는 교황에 대한 비판을 접으라는 요구에 이렇게 답했다. “나는 여기 서 있다(Hier stehe ich)”라며 신 앞의 양심을 역설했다. 불교 법어로 ‘수처작주(隨處作主)’, 우리 모두 당당한 주인공으로 다시 일어설 때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