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순태 소설가
지난 주말 2016년 제야를 앞두고 칠십 중반의 친구 넷이 모여 저녁을 먹으면서, 각자 송년에 대한 소감을 나누었다. 교수 출신 K는 촛불시위에 한 번도 나가지 못한 것이 부끄럽다고 했다. 그는 가수 전인권이 부른 애국가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다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폭력이 아니라 눈물임을 깨달았다고 했다. 고등학교에서 평교사로 35년간 국어를 가르쳐 온 P는 아내와 함께 자가용을 몰고 전국 일주를 하기로 약속했었는데, 아내가 뇌출혈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 수포로 돌아갔다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중소기업체에서 간부로 있다가 정년을 맞은 후 사진가로 변신한 C는 티베트 수도 라싸(拉薩)의 다자오스(大昭寺)에서 오체투지를 체험할 계획이었는데 이루지 못했다면서 아쉬워했다.
나는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섬이 있었지만, 어영부영 살다가 계획을 이루지 못했다. 신안군 비금도. 66년 전인 1951년, 6·25전쟁으로 고향에서 소개(疏開)를 당한 우리 가족은 목포에서 배를 타고 비금도에 도착, 파시(波市)로 잘 알려진 바닷가 마을 원평리에 방을 하나 얻어 살았다. 아버지는 염전에 고무래질 일을 나가고, 어머니는 도붓장수로 매일 집을 비웠다. 나와 동생은 너무 배가 고파 주인집 밭에 먹음직스럽게 열린 피마자 열매를 따서 볶아먹고 사흘 동안 줄줄 설사를 했다. 그 시절은 너무 배가 고팠다. 그 후 삶이 곤고할 때마다 그때 일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곤 했다.
“올해는 우리 넷이 한꺼번에 소원을 모두 이룰 방법이 있네.” K는 2017년에 넷이 함께 촛불시위도 나가고, 자가용 몰고 전국 일주를 하고, 라싸에 가서 오체투지 체험도 하고, 비금도에 가서 피마자 열매를 볶아 먹어 보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그렇게 2016년에 못 이룬 각자의 소망을 새해에 함께 해결하기로 약속했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 보았던 영화 ‘버킷 리스트’(The Bucket List)가 생각난다. 자동차 정비사 카터(모건 프리먼)와 재벌 사업가 에드워드(잭 니컬슨)는 우연히 같은 병실에 입원하게 된다.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상대에게서 공통점을 발견한 그들은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 여행을 떠난다. 세렝게티에서 사냥하기, 문신, 카레이싱, 스카이다이빙, 눈물 날 때까지 웃어보기, 가장 아름다운 소녀와 키스해보기 등이 그 내용이다. 이들은 여행을 하는 동안 인생의 기쁨과 삶의 의미를 깨닫고 웃음과 통찰을 통해 감동하고 우정을 확인한다.
해가 바뀔 때마다 시간의 흐름이 더욱 빨라지는 것을 절감한다. 마치 시간의 미끄럼틀을 타고 활강하는 기분이다. 이럴 때 하루, 한 시간이 참으로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로 알고 살라’는 말이 참으로 절절하다. 나이가 들면서 시력은 자꾸 떨어지지만 세상은 더욱 명징하게 잘 보이는 건 왜일까. 자기중심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의 색깔은 하나에 불과하지만, 총체적 시선으로 보면 세상은 현(玄)의 빛깔이 조화롭게 어울려 선연하게 보인다. 검은색 안에 여러 색깔이 모여 하나로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기만의 독법으로 세상을 보면 충돌과 대립이 따르지만, 총체적인 시선으로 보면 이해와 배려가 가능해진다.
어느 날 빅토르 위고는 후배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후배는 ‘50세가 되고 보니 인생이 허무해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위고는 ‘50세는 젊음의 끝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나이는 노년의 시작이 아닌가. 자네의 지난날은 인생의 연습이었다면 이제부터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니 희망을 가져라’고 답장을 보냈다. 새해에는 무엇이라도 시작해 보자. 도도하게 흐르는 양쯔(揚子)강도 남상(濫觴)에서 비롯된다. 술잔 넘칠 정도의 작은 물줄기에서 시작하여 큰 강을 이룬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중고차를 팔아 마련한 1300달러로 애플을 시작하지 않았던가.
2016년 우리는 국정농단이 빚은 분노의 강을 지나왔다. 그러나 뜨겁게 타오른 촛불의 파도 속에서 빛나는 희망을 보았다. 우리는 인내와 용기로 새 역사를 쓰기 위해 다시 도전할 수가 있다. 모든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다. 우리는 지금 절망의 낭떠러지에 서 있는 게 아니라, 불안과 절망의 다리를 건너 새롭게 시작하는 출발점에 서 있는 것이다. 이제 분노와 증오의 정치를 끝내고 화합과 희망의 길을 함께 모색해야 한다.
‘과거의 창을 통해 미래를 보라’는 말이 있다. 과거를 잊지 말되 과거의 시간 속에 묶이지 말아야 한다. 과거에 매여 있는 한 진정한 시작은 없다. 새해에는 절망을 보지 말고 희망을 향해 새로 출발하자. 우리 주위에는 시작조차 못 하는 사람이 많다. 한 해의 시작을 단순한 일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미 늦었다고 포기해서도 안 된다. 언제나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발전이 있다.
인생이란 시간의 배를 타고 끝없는 항해를 계속하는 것이다. 항해하면서 1년에 한 번씩 기항지에 도착해서, 잠시 쉴 여유도 없이 닻을 올리고 다시 출항하기를 평생 되풀이하는 게 우리의 삶이 아닌가. 출항할 때마다 꿈을 안고 희망의 보따리를 배에 가득 싣지만, 항해 도중에 풍랑을 만나 위험해질 때마다 보따리를 하나씩 바다에 던져버린다. 결국 빈 배로 기항지에 도착하게 되는데, 보따리 하나라도 남아 있다면 성공했다.
내가 어디에 있든 태양은 언제나 나를 중심으로 떠오른다. 그러므로 내가 바로 이 세상의 주인인 것이다. 우리 모두 가슴을 펴고 눈을 크게 떠 태양을 보자. 제발 올해는 모든 의혹을 투명하게 밝히고 소통으로 신뢰를 회복하자. 그리하여 새해에는 모두 안녕들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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