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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바람길] 고독

바람아님 2017. 1. 14. 23:22
세계일보 2017.01.13 22:03

고독의 사전적 의미는 ‘혼자라고 느껴 외로운 것’이다. 인간이라는 종의 절대적 본질이 고독이라지만 적어도 생명을 누리는 동안은 끊임없이 그 고독을 피해 달아나려는 게 또한 본능이기도 하다. 그 고독을 어찌할 수 없을 때 짐짓 끌어안는 척도 하지만 그 태도가 어디까지 진실일 수 있을까. 하물며 백 년씩이나 지속되는 고독이라니.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1927~2014)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백년의 고독’은 단지 외로운 고독과는 차원이 다르다. 한없이 쓸쓸한 구제받을 수 없는 고독이고 그 고독의 허리케인에 휩쓸리면 존재와 그를 둘러싼 세계까지 영원히 소멸되는 블랙홀이다.


그 고독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어찌 해볼 수 없는 불가항력의 포기 상태와도 닮았다. 아득한 슬픔을 동반한다. 낭만적인 감정일 수도 없는 것이, 낭만적이라 함은 언젠가는 회복될 기대가 어느 정도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출구가 없는 마지막이라는 공포와는 다른, 체념한 듯 받아들이는 깊은 슬픔과 닮은 정서가 저 마르케스의, 라틴아메리카와 ‘마콘도’의 고독이 아니었을까.


인간의 깊은 내면을 장엄하게 혹은 비통하게 정열적으로 파고들어간 북반구의 거장 도스토옙스키의 글은 가히 종교적 차원의 울림을 준다. 조국의 슬픈 현대사를,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을 하얀 햇빛이 사철 내리는 남방에서 도스토옙스키처럼 직격하기는 난감했을 것이다. 마르케스는 ‘백년의 고독’에 직설적인 방식으로 조국의 고독을 담아내진 않았다. 현실과 환상을 치환하는 이른바 ‘마술적 리얼리즘’을 창안해 콜롬비아의 현실을 뛰어넘어 남미의 고독을, 더 나아가 인류의 저주받은 ‘고독’을 세기의 벽화에 굵고 깊게 음각했다.


최근 새로 출간된 ‘백년의 고독’ 습작노트 같은 마르케스의 첫 장편소설 ‘썩은 잎’을 접한 뒤, 그가 기록한 고독에 한반도의 고독이 겹쳐 떠오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미국과 중국과 일본이 각축을 벌이는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운명의 ‘고독’을 마르케스라면 어떻게 표현해냈을까. 정권마다 되풀이되는 비리와 국정 난맥이라는 ‘고독’은 또 어떻게 녹여냈을까. 마르케스 소설 속 인물은 “노년기를 좋게 보내는 비결은 다름이 아니라 고독과 명예로운 조약을 맺는 것”이라고 했거니와 스스로 유폐되어 세상과 단절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일까. 소설 속 고독과 한반도의 고독은 같지만 다르다. 북반구의 반도에 사는 열혈 주민들은 되풀이되는 저주를 마냥 방치하진 않을 것 같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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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고독’의 주요 설계도

마르케스 첫 장편 ‘썩은 잎’ 재번역 출간


20세기 남반구 최고의 작가로 각광받는 콜롬비아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1927~2014·사진). 그의 대표작 ‘백년의 고독’은 남미문학을 세계문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고전 반열의 작품이다. 가상의 공동체 ‘마콘도’라는 마을을 등장시켜 이곳의 흥망을 마술적 리얼리즘 기법을 사용해 장엄한 교향악처럼 그려냈다. 최근 국내에 새롭게 번역돼 나온 그의 첫 장편 ‘썩은 잎’(송병선 옮김?민음사)은 ‘마콘도’라는 무대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백년 고독’의 중요한 설계도라는 차원에서 의미가 크다.

마콘도에 어디서 왔는지 모를 이방인이 들어와 이 마을 유일한 의사로 살았다. 그는 외국계 바나나농장이 들어와 진료소를 차리자 아무도 찾지 않게 된 공간을 지키다가 문을 닫고 만다. 이후 그는 철저하게 스스로 유폐되어 살아간다. 어느 날 바나나 회사 자본에 맞서 봉기했던 마을 사람들이 부상당해 이 의사의 집 문을 두드리지만 끝내 그는 응답하지 않아 두고두고 원수가 된다.

마콘도에 일찌감치 정착했던 대령과 그의 딸, 손자 3대가 이 남자와 맺은 인연 때문에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게 이 소설의 기둥 구성이다. 대령은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는 그 의사와 유일하게 소통했고, 의사가 죽으면 반드시 대령이 공동묘지에 묻어주기로 약속을 한 터였다. 의사는 유폐된 채 스스로 죽어가다가 끝내 밧줄로 목을 매 자살한다. 가톨릭 계율이 엄격한 마을 공동체에서, 그것도 마을 사람들을 치료하지 않아 원수가 된 그 남자는 철저하게 외면을 받지만 모든 난관을 감수하면서 대령은 그를 매장하기 위해 찌는 듯 더운 날 시체가 있는 폐쇄된 공간으로 딸과 손자를 데리고 간다.

이날 오후 2시30분부터 관을 앞세워 길로 나서는 3시까지, 이들 3인이 각자의 시각으로 그간의 경과와 인연을 돌아보는 이야기가 이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도 그로테스크한 고독의 뿌리는 이미 보인다. 있는 게 분명하지만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가족,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오갈 데도 없었던 그 남자는 대령의 목숨을 구해준 뒤 이렇게 말했다. “대령님, 내게 호의를 베풀고 싶다면, 내가 빳빳하게 굳어서 새벽을 맞이했을 때 약간의 흙을 내 몸 위에 뿌려주십시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그게 유일합니다. 그래야 독수리들이 나를 먹어 치우지 않을 테니까요.”

조용호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