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허기 달래는 그 대화 누가 탓하랴
황주리 < 작가 >
‘혼술’ ‘혼밥’이라는 말이 시대를 상징하는 단어가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이미 30년 전 나는 뉴욕 유학 시절에 혼술 혼밥의 고독을 제대로 즐겨본 사람 중 하나다. 1980년대 말 뉴욕 맨해튼의 크리스마스 저녁, 극장에서 혼자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 그때는 한국에서 극장에 혼자 들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시절이다. 1987년 크리스마스에 혼자 영화를 보고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었던 생각이 난다. 여기저기 혼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나 자신 미래적인 혼밥·혼술족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세대의 혼술 혼밥은 우리 시절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지금은 예전처럼 혼자 밥을 먹거나 술을 먹는 게 아니라 스마트폰과 함께 먹고 마신다. 누군가와 카톡을 치거나 게임을 하면서. 어쩌면 지금의 젊은 세대는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닌, 혼자를 잃어버린 세대다. 혼자 있으면서 혼자 있지 못하는 상태가 꼭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 좋고 나쁨을 떠나서 외로움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본능이 외로운 상태를 즐기는 상태로 진화돼온 건 아닐까? 아니 거기에는 경제적 시간적으로 절약하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 아니 오늘의 혼술 혼밥의 개념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누군가와 같이한다는 착각을 주는 것이라 한다. 진화라 하면 노시인은 노하실지도 모르겠다. 혼자 술 마시는 건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고독의 산물이었다고 말하는 시인 고은 선생의 “고독 모르는 것들이 고독하다고. 이것들아 천년 욕망 꺼져야 고독이야” 하시는, 세상사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단독자의 초상을 노시인에게서 배운다.
하긴 세상이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요즘 세상은 그리 좋은 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집으로는 작고 편리한 쉼터면 족하다. 밖으로 나가면 온 세상이 다 휴식처다. 너무 넓고 럭셔리한 쉼터들이 카페의 이름으로 줄줄이 늘어서 있다.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몇 시간을 있어도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 아름다운 강 풍경이라거나 실내 장식이 예술의 경지라 앉아만 있어도 즐거워지는 그런 장소들이 넘쳐난다. 언제부터 우리는 커피숍을 카페라 부르기 시작했을까. “혼술 한 잔 하실래요?” 하고 속삭이는 와인바 맥주바 위스키바들도 넘쳐난다. 사실 어쩌면 생각하기 나름으로 지상의 그 모든 멋진 장소들이 다 내 집이다. 우리는 정말 왕처럼 살고 있다.
어쩌면 100년 뒤엔 아무도 집을 사지 않는 세상이 올지 모른다. 그저 잠시 머무르다 더 편리하고 마음에 드는 공간으로 계속 옮겨 사는 신유목민의 시대, 어쩌면 부유한 사람들이 실제로 행하는, 겨울에는 따뜻한 곳으로 여름에는 서늘한 곳으로 옮겨 사는 꿈의 시대가 머지않아 올지 모른다. 언젠가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문득 이게 바로 ‘영혼의 다단계’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잘 쓰면 우리의 고독을 토닥이는 좋은 친구지만, 잘못 쓰면 영혼에 부작용이 생기는 싸구려 약 같은 거랄까?
하지만 정말 SNS 덕에 심심하거나 외로운 사람은 없어져간다. 라면처럼 인스턴트 영혼의 허기를 채워주는 우리들의 SNS 대화는 점점 더 넓게 세계를 향해 퍼져나간다. 하긴 순간의 허기를 절묘하게 채워주는 라면을 누가 함부로 말하랴? 다시 한번 노시인의 말씀을 적어본다.
“미래는 늘 캄캄하다. 미래는 어두워야 미래다. 우리는 늘 아무것도 모르는 세상으로 가는 거다. 미래여 오라.”
황주리 <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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