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살며 사랑하며-유형진] 의리의 의미

바람아님 2017. 2. 5. 23:23
국민일보 2017.02.05 18:48

요새 뉴스를 보다 보면 세상에 이렇게나 의리 넘치는 이들이 있었는지 깜짝 놀랄 때가 많다. 몇 년 동안 문자를 주고받던 사이였으면서 서로 모른다고. 내가 살려고 그러는 것인지 상대를 살리려고 그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오랜 친구와의 우정, 수 십 년을 해로하고 있는 부부에게 의리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위기에 닥쳤을 때 시험되고 그때 비로소 발견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혀를 내두를 사기와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가진 피의자들이 의리로 뭉쳐 너무도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카메라 세례를 받는 모습을 보다 보면, 저들의 믿는 구석은 도대체 뭘까 싶다. 하지만 그것이 돈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는 것은 내가 너무 순진한 것일까?


최근 재밌게 본 드라마에서 조실부모하여, 사고무탁한 고삼 수험생인 여주인공이 밤에 묵을 곳이 없어 아르바이트하는 치킨가게에서 숙박을 해결하고 있었다. 그때 그 치킨가게 여사장은 그 사정을 알고, 알바비를 주급으로 당겨 주며 찜질방이라도 가서 편하게 씻고 오라고 한다. 그때 그 소녀는 ‘사장님 멋있어요’라고 하는데, 그 여사장은 ‘내가 멋있는 게 아니고 돈이 멋있는 거야’라고 말한다.


같은 돈이라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돈은 그렇게 멋있는 것이 된다. 하지만 요즘 들리는 뉴스의 주인공들이 썼던 돈들은 정말이지 멋있는 것은 고사하고 참 더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래서 많은 사람들이 돈을 무서워하고, 돈을 혐오하고, 자본주의의 참혹함만 더 깊이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껏 살면서 느낀 것은, 하루하루 빠듯하게 사는 사람들일수록 돈이 의리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사업에 실패한 동생에게 남 몰래 건네주는 형님의 흰 봉투.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입원한 친구의 환자복 주머니에 놓고 가는 오만원짜리 한 장. 부모는 안 사주는, 갖고 싶은 장난감을 사라고 조카의 고사리손에 쥐어주는 네 겹으로 접힌 고모의 만원. 그랬던 따뜻한 돈이 수십억, 수조원으로 단위가 넘어가 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의리가 아니다.


글=유형진(시인), 삽화=전진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