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 쪽으로 갈까 잠시 망설인다. 한쪽은 산으로 이어지는 호젓한 오솔길이고 다른 쪽은 자동차가 다니는 이차선 도로를 따라가는 보도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을 걷는 것은 산책의 맛이 제대로 나지 않아 꺼려지고, 호젓함을 누리며 걸을 수 있는 길에서는 이따금 나타나는 한 두 사람의 그림자에 긴장하고 겁을 먹게 된다. 깜깜한 밤도 아니고 어둑어둑한 저녁 무렵도 아니고 훤한 대낮임에도.
아주머니 한 사람이 오솔길로 접어든다. 나도 그 뒤를 따른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이 지긋한 여성들이다. 좌석버스에 올라타서 빈 자리가 있나 둘러볼 때, 기차역이나 병원 대기실 같은 곳에서 누군가의 옆자리에 앉아야 할 때, 내가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은 할머니다. 누구에게든 어떤 방식으로든 위해를 가할 확률이 가장 낮은 사람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할머니와 봉고차’ 라는 주제로 변주를 거듭하는 도시괴담들이 있다.
‘친구의 친구가 겪은 일이래...’라든가, 혹은 익명의 인터넷 게시판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로 시작되는 이야기들. 버스 안에서 할머니와 시비 끝에 함께 버스에서 내린 여학생이 봉고차에 끌려갈 뻔했다거나, 할머니의 무거운 짐을 들어준 감사 표시로 건네 받은 건강음료를 마셨다가 정신을 잃고 봉고차로 끌려갔다는 이야기들. 나도 경계심이 지나친 사람이기는 하지만, 대단한 반전이랍시고 할머니까지 등장시켜 이 세상 누구도 결코 믿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학습시키고자 하는 괴담들은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다.
불교에서는 자신이 소유한 재물, 지혜나 지식, 혹은 재능을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것을 보시라 부른다. 보시는 결국 공덕을 쌓고 복을 짓는 일이니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그럼 재산도 없고 지혜나 지식도 없고 내세울 재능도 없는 사람은 복을 지을 수 없는 걸까? 무외시(無畏施)가 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두려움을 주지 않는다는 의미다. 다른 이들을 불안하게 하거나 겁을 주지 않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일이다.
감정은 전염되기 쉬워서, 화가 난 사람 옆에 있으면 누구나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즐거운 사람 옆에 있으면 반드시 즐거워진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흔히들 얼굴 표정을 밝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미소 한 번이라도 건네는 것을 무외시를 실천하는 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저 아주머니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은 채, 그냥 내 앞에서 걸어가는 것만으로 자기도 모르게 무외시를 행하고 있다. 이제까지 내 옆 자리에 앉아 주었던 모든 할머니들처럼 존재 자체가 보시다.
가장 복을 많이 지을 수 있는 보시는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베풀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베푸는 것이라고 한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받는 일일지도 모른다. 보답 받을 마음이 없으니 보답할 부담이 없고, 베푼 사람이 없으니 받은 사람이 없는 베풂. 온 세상을 향해 이루어지는 보시.
저만치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 아이 하나가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면서 폴짝폴짝 뛰어온다. 젊은 여자 둘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이의 뒤를 따라온다. “엄마 생일이라고 저렇게 계속 노래를 부르는 거야?” 그러자 사내아이의 엄마가 분명한 여자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한다. “쟤는 나밖에 몰라. 쟤네 아빠는 쟤밖에 모르고.”
며칠 전에 대학을 졸업한 아들을 둔 엄마인 내가 그들을 지나치며 혼자 웃는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웃음이 나온다. 나도 언젠가는 존재만으로 편안함을 주는 할머니가 될 거라서? 마침내 겨울이 가고, 보답하지 않아도 되는 다정한 선물, 봄이 오고 있으니까?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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