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트마 간디는 깡마른 체구에 둥근 안경테 너머로 쏘는 듯한 형형한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또 몸을 최소한의 옷으로 가린 채 하염없이 물레질을 반복한다. 이런 행동은 그 자체가 독립운동이었다. 식민지 국민이 할 수 있는 비폭력저항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런 모습을 보며 또 나름의 상상력을 보탠다. 모르긴 해도 목화솜을 이용하여 실을 짰을 것이다. 그렇다면 생산하고자 하는 옷감은 무명천이다. 인도는 예나 지금이나 유명한 면화 원산지인 까닭이다.
고려말기 문익점(1331~1400) 선생은 목화를 한반도에 처음 들여왔다. 당시 목화는 최첨단 의류재료인 까닭에 원(元)나라 조정에서 엄격하게 관리하던 금수품목이었다. 대륙 주변의 여러 나라에서 많은 이들이 유출을 시도하다가 좌절했을 것이다. 그 역시 이런저런 궁리를 했다. 순간 씨앗을 붓뚜껑 속에 몰래 숨겨 옮기는 방법이 섬광처럼 스쳐갔다. 붓이라는‘착한’물건 속에 도둑질한‘나쁜’물건이 들어 있을 리 없다는 성선설(性善說)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다. 그리하여 세관원의 예리한 눈길을 따돌리고 무사히 국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개인적인 부를 축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 전체를 위해 선의로 한 일이며, 밀수이지만 동시에 밀수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목숨 걸고 몰래 가져온 세 개의 씨앗 가운데 한 개만 겨우 싻이 텄다고 하다. 하긴 극적인 요소가 가미돼야 스토리가 더욱 흥미진진해지는 법이다. 어쨋거나 정성을 다해 키운 덕분에 3년 만에 동네 밭을 모조리 목화밭으로 바꿀 수 있었다. 장인과 손자까지 합세한 가족기업 형식으로 운영했다.‘물레’라는 이름도 ‘무명’이란 옷감 이름도 모두 문씨 집안의‘문’이라는 글자에서 나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당시에 목화의 모든 것은 문씨집안으로 통했다.
그 시절 고급옷감인 비단은 귀하고 비싼지라 양반계급만 입을 수 있었다. 대다수 서민들이 이용하는 삼베와 모시는 겨울에는 사용할 수 없는 옷감이다. 당시의 관료들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신분제의 칸막이로 인하여‘농(農)’에는 대부분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선생은 지리산 언저리에서 농사 짓던 경험을 가진 덕분에 남의 나라에서 만난 낯선 목화이지만 그 귀중함을 한 눈에 알아본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 백성에게 제대로 된 옷을 입힌 공덕을 남겼다. 더불어 역사에 의류혁명가로 기록되었다.
이제 목화는 경남 산청 단성 배양마을 목화시배지에 관광 삼아 가야 볼 수 있는 귀한 물건이 되었다. 전국의 목화밭도 대부분 없어지고 생활 속에서 솜이불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다. 더욱이 뭉친 이불솜을 다시 새것처럼 만드는 작업인‘솜 탄다’는 말도 듣기 힘들다. 그리고 솜옷마저 거의 사라졌다.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선생의 창조경제 업적과 벤처정신은 옛세대가 배운 것처럼 아직도 중등학교 교과서 속에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할 것 같다. 지금도 그대로 교과서 속에 있는지 궁금하다.
요즘 젊은이들은‘목화’라는 물건을 의외의 장소에서 만나고 있었다. 어느 날‘도깨비’라는 TV 인기드라마 한 장면에 목화꽃다발이 등장했다. 이후 졸업식장 입학식장 그리고 개인기념일 할 것 없이 꽃다발이 필요한 곳의 수요 증가로 수입 목화꽃이 동이 나고 웃돈을 줘야 구할 수 있는 귀한 물건 대접을 받고 있다. 문익점 이후 최고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김영란법(청탁금지법)으로 불황에 허덕이던 꽃시장에 오랜만에 등장한 히트상품이 되었다.
이제 목화밭은 ‘경관 농업’이 되었다. 농작물이 아니라 관상용으로 바뀐 것이다. 관광지 유채꽃처럼 사진을 찍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뒷배경이 되는 물건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에는 'cotton'마크가 찍힌 면으로 만든 제품이 넘쳐나는 것을 보면 이땅에 농작물로서 목화가 없어도 갖가지 면제품을 맘껏 쓸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라고 해 두자. 가격경쟁력이 없다 보니 국내생산을 포기해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그런 부분에 대한 문제의식도 같이 사라졌다.
『주역』에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고 했다. 씨과실은 절대로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농부는 씨앗주머니를 베고 죽는다는 뜻이다. 내가 죽어도 뒷사람을 위해 남겨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대의 ‘종자전쟁론’의 근거인 셈이다. 하지만 IMF 때 많은 국내의 종자기업이 외국계회사로 팔려나갔다고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 하지만 경제논리 앞에 씨과실마저 남에게 넘겨버렸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석과불식 정신도 같이 사라진 것이다.
서을 한복판 인사동 입구 커피집에서 목화를 만났다. 은행으로 사용되던 공간이 어느 날 인테리어 작업을 거치더니 널찍한 가게로 개장했다. 컨셉은 목화였다. 입구에 솜꽃이 달린 목화나무가 서있고 안쪽 자리 가운데 목화솜으로 만든 꽃다발을 공중에 매달았다. 나오는 문 앞에 목화의 학명이 'gossypium'이라는 설명을 붙이고서 가게이름 ‘꽃이피움’의 출처로 소개했다. 알파벳 발음을 우리말로 그럴듯하게‘소리번역’하는 안목의 극대치를 보여준다. 문득 유치환 시인의 ‘깃발’마지막 구절이 생각났다.“아아 누구던가? ....맨처음 (깃발을) 공중에 달 줄 안 그는?”
그렇다면‘꽃이 피는 것’을 ‘목화’학명에 처음으로 대입할 줄 안 그 혹은 그녀는 도대체 누구일까?
원철 스님,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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