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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요일에 보는 경제사]조선시대 '공시족'들의 합격비용은 얼마?

바람아님 2017. 3. 31. 23:06
아시아경제 2017.03.31. 11:13
경희궁 과거시험 재현행사(사진=아시아경제 DB)


경상북도 문경(聞慶)시는 이름의 유래가 특이한 곳 중 하나로 유명하다. 문경이란 한자의 뜻은 '문희경서(聞喜慶瑞)'란 말의 줄임말로, '기쁘고 경사스런 소식을 듣는 곳'이란 의미다. 여기서 기쁜 일은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것으로 영남의 선비들이 이 길을 통해 합격 소식을 듣고 한양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경사를 듣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지금은 매년보는 국가 공무원 시험에 한해 30만명 가까운 응시자가 2% 남짓한 합격률에 목을 매며 공부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이보다 더 살인적인 경쟁이 펼쳐졌다. 조선 정조 때는 매번 15만명이 넘는 유생들이 응시해 0.07%에 불과한 합격률에 도전했다. 그나마 당시엔 과거 정시가 매해 있던 것이 아니라 3년에 한번이었다.

장원급제자가 받은 교지(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전 세계에서 이 공시족 문제가 가장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는 한국이다. 서기 958년, 고려 4대 임금인 광종(光宗)이 중국에서 귀화한 관료인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처음 과거제도가 실시된 이래 시험으로 관료를 뽑는 체제는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어지고 있다.


원래 인사제도가 주로 추천제로 이뤄지던 서구권에서 과거제와 같은 시험제도가 등장한 것은 19세기의 일로 중국의 과거제도를 연구해 만든 것이다. 봉건 영주들과 그 가신들로 구성된 무가 통치가 이어졌던 일본은 과거제가 도입되지 않았고 과거제도의 본가인 중국조차 몽골제국의 지배시기인 13~14세기동안엔 과거제의 맥이 끊어졌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유구한 역사동안 계속 과거제가 이어지며 공시족들을 양산해왔다.


공시족들을 뒷받침하기 위한 가계의 부담과 사회적 비용은 지금도 엄청나지만 조선시대에도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보통 평균 35~40세는 돼야 합격할 정도로 어려운 시험인데다 80세가 넘어 합격한 사람도 있을 정도로 평생을 여기에 바친 장수생들도 수두룩하다보니 비용이 얼마가 들지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었다.

초시에 장원급제자의 모습(사진=서울역사박물관)


더구나 각 지역에서 보는 초시에 합격한 이후 대과에 응시하려면 한양으로 가야하는데 당시의 미비한 교통로와 여행기간 등을 고려하면 한양에 가는 것만 해도 막대한 돈이 들었다. 평균 연령인 35~40세에 합격했다고 가정해도 최소 600냥은 들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당시 기와집 2채 값이다. 돈없는 집안에서는 절대로 할 수 없었던 엄청난 투자였던 셈이다.


또한 많은 선비들이 한양에 눌러앉아 공부하면서 이들의 체류비용도 큰 문제였다. 지금도 고시촌의 대명사로 유명한 신림동 고시촌 근처는 조선시대에도 복잡했다고 한다. 관악산이 산세가 좋다며 근처 절에 방을 얻어 공부를 하는 선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관악산을 '벼슬산'이라 불렀다고 할 정도다. 하지만 이들도 순수하게 산세가 좋다고 관악산에 눌러앉아 공부를 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과거시험 초시의 경우에는 향시라고 해서 지방별로 인구대비 합격자 인원이 배정돼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공기업 지역쿼터제, 지역안배제도와 같은 제도인데 당시엔 수도 한양에 배정된 합격자 인원이 가장 많았다. 문과의 경우 한양은 40명, 경상도 30명, 전라도 25명 등의 순이었으며 함경도와 황해도는 가장 적은 10명씩 배당됐다. 여러모로 시험 정보나 서적을 구하기도 쉽고 합격자 배정인원도 가장 많은 한양에 오래 체류하며 시험준비를 하는 것이 유리했던 것.

과거시험에서 사용된 컨닝용 속옷(사진=위키피디아)


이것도 그나마 시험의 공정성이 담보됐을 때의 이야기였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과거시험 비용은 점점 높아졌는데 이는 순수한 시험비용 외에 뇌물로 써야할 비용이 막대해졌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말기인 고종(高宗) 때는 과거제가 매우 문란해져 아예 대놓고 합격비용을 받는 매과(賣科)가 극성을 부렸다.


구한말 학자이자 순국지사인 황현(黃玹)의 매천야록에는 이 매과가 처음엔 200~300냥에 과거합격자리가 오고가다가 1894년, 마지막 과거시험이 치러진 해에는 1000냥을 넘어 거래됐다고 한다. 좋은 인재를 구하고자 만든 제도가 이렇게 변질되면서 오히려 망국을 부추기는 악습으로 비판을 받자 결국 갑오개혁과 함께 과거제도는 사라지게 됐고 근대식 임용제도가 시작됐다. 하지만 이 임용제도도 각종 비리와 의혹들로 몸살을 앓으면서 점차 수많은 공시족들의 분노를 일으키는 제도로 변질되고 있으니 반복되는 역사의 아이러니인 셈이다.


디지털뉴스본부 이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