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房/풍경사진

[구암허준](1) 구암공원과 허준박물관

바람아님 2013. 9. 23. 14:09

 

 

 

 

 

 

 

허준 박물관

 

구암 허준이 우리 한의학계에 미친 영향은 실로 대단한것이며 그의 저서 "동의보감"은 현대의학에서도

통용될 정도로 훌륭하다. 또한 체제를 갖춘 편집은 세계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 볼수 없으며 이에

2009년 7월 그가 저술한 "동의보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이밖에도 선생은

각 부문별 의술을 기록한 "언해구급방",  "언해두창집요", "언해태산집요","신찬벽온방","벽역신방"등

수많은 의학서적을 완성 간행하였다. 올해로 선생이  집필한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이 되는해이다.

이에따라 허준박물관,강서구청,대한 한의사협회등이 다양한 기념행사를 하고 있어 그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허준의 출생에 대해서 대부분의자료에는 1546년 허륜의 서자로 태어나 1615년까지 산 것으로 기술 되어

있었으나 허준 박물관은 그동안 여러경로의 고증을 거쳐 1537년에 양천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허준의 본관은 양천,자는 청원, 호는 구암이며 임진왜란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한 공로로 호성공신

양평군의 군호와종1품 승록대부에 봉해졌다.선조가 승하하자 허준은 시의로서 귀양을 가게 됐고
귀양지에서도 선조의 명을 받아 그동안 해오던 의학서적을 계속해서 썼다. 귀양에서 돌아와

1610년(광해군 2년) 마침내 16년간의 연구 끝에 25권의 방대한 한의서인 <동의보감>을 완성하였고

1613년 25권25책의 동의보감이 정식 간행되었으며 올해가 400주년이 되는해이다.


이러한 의성(醫聖)허준선생이 태어나고 성장하였으며 동의보감을 집필하고 돌아 가신곳으로 알려진

서울 강서구 허가바위가 있는 탑산옆에  2004년 공립박물관을 개관하였으며 88고속도로 설치로

내륙으로 변한 광주바위 주변에 연못을 만들고 환자를 진료하는 모습의 동상을세워 구암공원을 조성 하였다.

현재는 옛날의 그 모습을 찾아 볼수 없으나 65세부터 70세까지(1740-1745년) 양천현감을 지낸

겸재 정선의 그림으로 보면 큰 탑산이 있었으나 88도로 건설하며 대부분을 허물었으며 궁산과 탑산을

기준으로 당시 한강은 현재의 한강에서 적게는200m 넓은곳은 약 300m 북쪽으로 줄어 들었으며 택지

부지조성사업으로 탑산의 대부분은 허물어 사용되고 지금은 박물관옆에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허준박물관과 주변에 있는구암공원에서 흩어져 있는 허준의 발자취를 사진으로 담아보고,약초원과

강서 예술인 ,문인들이 펼치는 400주년 기념 거리갤러리를 연이어 소개코자한다

.
차제에 이지역의 중심지였던 궁산지역의 양천향교와 소악루등도 사진에 담아 볼 계획이다.

 

 로비옆 작은회랑에 전시중인 사진으로 보는"허준박물관"

 

옛  양천지역의 지형 모형

 

전시실은 2층에 있다.

 

2층로비 대형 초상화

 

여기서 부터 동의 보감을 중심으로 각종저서,옛의약기등이 전시되어 있다.

 

동의보감 활자판

 

인쇄후 책으로 묶은 모습

 

 

 

초대형 악연(모형인지 실제 사용되었는지는 확인않됨)

 

의관과 의녀복장

 

 선조를 치료하는 모습

 

동의보감등 저서를 집필하는 모습

 

동의보감 제작과정

 

1,2,3,4 제작과정

 

완성된 서책 확인및 보관

 

동의보감 내용별 소개 시청각실

 

기념사업회의 활동상황

 

 

 

약초를 분쇄하는 의약기들

 

 약재 조재실

 

의약기실

 

내부촬영 금지로 외부에서 바라본 의약기들

 

한의원실 모형

 

 

 

내의원 모형

 

옥상 휴게실에서 바라 본 한강

 

 날이 맑지 않아 북한산이 뿌옇다

 

약초원 가는 길

 

구암공원에 있는 허준동상

 

공원연못

 

맨뒷쪽에 있는 것이 광주바위 

 

 광주바위

공암나루끝 한강변에 탑산 이라는 작은산옆 강물속에 있는 두개의 바위가 광주 바위이다
높이 12m의 바위이지만 바위 자체는 고색이 창연한채 옛모습을 그대로 들어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경기도 광주에서 큰홍수가 났을때 이 바위가 물에 떠내려 왔다고 한다.
광주현감이 양천현감에게 광주바위가 당신네 고을에 자리잡고 좋은 경치를 이루고 있으니
댓가를 지불하라고 하여 1년에 이 바위에서 나는 싸리로 만든 싸리비 세자루씩 매년 바쳤으나
그 후 양천현감이 억울한 생각이 들어 광주현감에게 바위를 도루 가져가라고 하자 광주현감은
더 이상 세금을 내라고 하지 못했다는 전설이 있다.

 

 

 소요정은 원래 탑산 남쪽 기슭에 있었는데 겸재의 그림에도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봐서 오래전부터

없어진듯하다 현재의 소요정은 구암공원을 조성하며 만든것으로 역사적 고증과는 거리가 멀다

 

 탑산 오르는산책길, 탑산은 훼손이 많이돼 명맥만 유지한다.

 

 

 

 공암바위 또는 허가 바위라고하며 탑산 북쪽 도로변에 있다.
주변이 복토를해서 지금은 도로보다 낮은곳에 위치하게 되었다.
허가바위는 양천허씨의영원한 성역이자 그들의 고향으로 시조인 허선문이 바로
이바위 동굴에서 태어 났다고 전한다
가양동이 개발되기 전에는 한강물이 바위 밑까지 차있었으며 자연동굴은 가로6m
세로2m 높이 5m정도로 최대 20여명이 들어 갈수 있는 규모이다.
이바위는 바위밑에 구멍이 있다하여 공암바위라고도 불리워진다.
또한 이동굴은 허준이 동의보감을 쓴곳으로도 유명하다

 

배들의 왕래가 잦던 공암나루는 장대한 역사의 흐름속에 휩쓸려 사라지고 나루터를 알리는 표석만이

이곳에 나루터가 있었음을 알려줄뿐이다. 이곳나루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투금탄 설화가 있는

곳이다. 고려 후기에 우애좋기로 소문난 이조년 이억년 형제가 있었다.
이들이 젊었던 시절 길을 가다가 동생인 이조년이 황금2개를 주웠다. 하나를 형인 이억년에게 주고

공암나루에서 한강을 건너고자 배를 탓다. 배가 한참 강을 건널때 동생이 갑자기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져 버린것이다. 엉덩이에 불이난 말처럼 깜짝 놀란형이
"야 이놈아~왜 귀한 금을 물에 던졌냐?"

그러자 동생이
"나는 형님을 위한 마음이 두터웠소 그런데 형에게 금을 나누어 주고 나서는자꾸 욕심이 들더군요,

자칫 그까짓 금덩어리 때문에 우리형제의 우애가 금이 갈것 같아서 미련없이 물에 던진 것이오"
그 말을 들은 형은 크게 감탄하며
"너의 말이 옳구나, 내 생각이 짧았다."

그러면서 금을 강에 던졌다. 그들이 금을 버린곳이 지금의 가양동 앞 여울로 금을 던진

여울이란 뜻의 투금탄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끝)

 

 

<사과의 말씀 : 박물관 내부 촬영이 금지된곳이 많아 충분히 담지 못했으며 조명사용을  못하므로 사진의 선명도가 낮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