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디자인·건축

[정경원의 디자인 노트] [135] 도시의 紋章 속에 살아남은 멸종 호랑이

바람아님 2017. 9. 25. 09:59

(조선일보 2017.09.25 정경원 세종대 석좌교수 디자인 이노베이션)


"시베리아에 검정 호랑이라니?" 

시베리아 호랑이라 하면 으레 연한 갈색 바탕에 선명하고 짙은 줄무늬를 연상하기 마련이라 다소 어색하게 들리지만, 

동부 시베리아의 중심 도시 이르쿠츠크시를 상징하는 문장 속의 호랑이는 검은색이다. 

옛날 바이칼 호수 주변에는 바브(Babr· 호랑이의 시베리아 사투리)가 많이 서식했는데, 주민들은 이 호랑이가 

시베리아를 풍요롭고 영광스럽게 만들어주는 행운의 마법을 갖고 있다고 여겼다.


러시아 이르쿠츠크 문장, 1690년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표트르 대제가 하사.러시아 이르쿠츠크 문장, 

1690년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표트르 대제가 하사. 

현행 로고 디자이너 및 연대 미상.


바브가 이르쿠츠크시의 상징이 된 것은 400여 년 전의 일이다. 

17세기 초부터 제정 러시아는 동부 시베리아 정벌을 위해 

카자크 기병대를 앞장세웠는데, 바이칼 호수 인근에 형성된 

그들의 정착촌이 크게 번창하여 도시가 되자 

1690년 표트르 대제는 바브가 그려진 공식 문장을 하사했다. 

원래 방패 형태의 문장에 그려진 바브는 은색 바탕 위에 

담비를 물고 푸른 초원을 질주하는 모습으로 보통 호랑이와 

다르지 않았다. 초피(貂皮)라 불리는 담비의 털과 가죽은 

예나 지금이나 가격이 워낙 비싸서 사냥꾼들의 선망의 대상인데, 

바브가 물고 가는 이유는 먹이가 많고 안전한 곳으로 옮겨주기 

위함이란다. 바브의 마력과 담비의 가치를 융합하여 도시의 

밝은 미래를 기원한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가면서 문장 속 바브의 색깔이 달라지고 

꼬리는 커져서 본래의 모습과는 다른 상상의 동물이 되었다. 

흰색 바탕에 두 발을 들고 있는 바브는 검은색이라 

다소 충충할 수 있지만, 빨간색 담비와 초록색 바탕과 대비되어 생동하는 활력이 느껴진다. 

바브는 19세기 말에 시베리아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무분별한 남획으로 멸종되었다. 

하지만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아름다운 도시 이르쿠츠크의 문장 속에 

비록 다소 달라진 모습으로나마 살아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