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10.11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금동제 세발솥, 입지름 11.25㎝, 창녕 말흘리 퇴장유구, 국립김해박물관.
2003년 7월 11일, 경남고고학연구소 조사단은 경남 창녕읍 화왕산 자락에서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도로 개설 예정지인 말흘리에서 여말선초 건물지 흔적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발굴을 시작해보니 고려 때 처음 만들어져 조선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증축 및 개축된
사찰 건물터가 자리하고 있었고 곳곳에서 통일신라까지 소급하는 와전류가 출토됐다.
발굴 시한을 며칠 앞둔 8월 중순. 조사원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유물을 무더기로 발견하곤
숨이 멎을 것 같은 전율을 느끼게 된다. 1호 건물지 서남쪽 모서리에서 발견된 10여 개
쇠솥 조각을 들어내자 지름 70㎝, 깊이 60㎝의 구덩이에 묻힌 쇠솥, 그리고 그 속에
가득 찬 통일신라 공예품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쇠솥 맨 위쪽에는 길쭉한 손잡이를 갖춘 병향로(柄香爐), 다리가 셋 달린 솥, 자물통과 자물쇠, 귀면 장식 문고리가 쌓여
있었고 그 아래쪽으로는 다양한 무늬를 유려하게 새긴 금동제품 수백 점이 차곡차곡 채워져 있었다. 구덩이와 쇠솥 사이
빈 공간에서도 건물 추녀 끝에 매달았던 금동제 풍경이 19점이나 출토되었다.
모두 안압지나 황룡사지 출토품에 필적하는 보물급 문화재였다.
최종규 단장은
"불단을 장식했던 장엄구, 건물에 매달았던 풍경, 불교의식용 도구로 구성된 이 유물은 사찰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하면서
그것이 땅속에 묻히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로 전란을 지목했다. 약탈과 방화로 사찰의 존폐마저 걱정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아 후일을 기약하며 사찰 보물 가운데 일부를 땅속에 묻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학계는 이를 퇴장유구(退藏遺構)라 부른다.
고고학자에게 퇴장유구의 발견이란 쉽게 찾아오기 힘든 행운이지만, 전란의 소용돌이에서 보물을 다시금 찾아내지 못한
이들의 안타까움이란 상상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영영 사라진 줄만 알았던 그 보물은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들과 조우하며 여전히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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