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대한제국은 어떤 나라였나
서양의 근대적 제도·문물은 대부분 극서(極西) 국가들이 14세기 말부터 400년간 유교문명권에서 배워간 것들이었다. 유교문명권은 12세기에 이미 ‘보편사적 근대’를 개시했었다. 19세기 말 제기된 극동의 ‘근대화’란 ‘전근대’가 아니라 보편사적 차원의 ‘낮은 근대’에서 ‘높은 근대’로의 도약이었다. 극동국가들은 극동에서 배워 근대화된 서구를 더 빨리 배워 50년 만에 ‘높은 근대’를 이루었다. 서구적 근대성의 DNA가 유교적인 까닭이다. 이는 이슬람·힌두·불교국가가 다 근대화에 실패한 것에서 반증된다.
대한제국은 유교문명의 ‘보편사적 근대’와 한국 고유의 문화유산을 발판으로 ‘높은 근대’로 도약했다. 근대국가로 올라섬과 동시에 군사강국, 경제대국으로 치솟은 것이다.
대한제국은 ‘조선중화론’과 ‘신(新)존왕주의’라는 고유의 철학에 입각해 창건된 사상 초유의 황제국가로서 다른 황제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독립국가였다. 한국 최초의 헌법인 ‘대한국 국제(國制)’ ‘제1편’은 ‘독립국가’(제1조)와 ‘전제정’(제2조)을 규정하고 있다. 당시 만국공법에서 ‘전제정’과 ‘군주정’은 동의어였으므로 제2조는 전래의 군주정을 ‘성문화’한 것이다. ‘제1편’이란 말은 시민권을 다룰 ‘속편’을 예고한 것이다. 대한제국은 헌법을 갖췄으므로 입헌군주국이었고, 구본신참론(舊本新參論)에 따라 근대화를 추진한 고종은 정의(定義)에 따라 ‘계몽군주’였다.
또한 대한제국은 평민·천민을 차별 없이 등용한 명실상부한 백성의 나라 ‘민국(民國)’이었다. 영·정조 시대 위로부터 추구된 ‘민국’ 이념이 사회경제적 발전과 향회·민회의 발달 과정에서 아래로부터 실(實)을 얻고 대한제국에서 완성된 것이다. 그리하여 ‘대한’과 ‘민국’이 결합된 ‘대한민국’ 국호가 1899년부터 이미 여러 신문과 정부태환권의 도안에서 쓰이게 된다. 프랑스 외의 모든 유럽 국가와 미국·일본을 능가했던 한국의 신분해방 수준은 서민들의 대거 관직 진출과 광무호적에서 입증된다. 광무호적은 신분을 명기한 명치호적과 달리 아예 신분란을 두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근대사법·사유재산제 등 각종 신규 제도를 도입했다. 또한 고종은 1898년 중추원을 개편해 독립협회·황국협회 회원을 의관에 임명해 대의정치를 개시했다.
군사적으로 대한제국은 ‘아시아 2위의 군사강국’이었다. 고종은 1897년 당시 1000여 명의 신식 병력밖에 없었지만, 이 병력을 교관·조교로 활용해 신식 군대를 기르고, 첨단병기들을 수입하거나 자체 제작해 무장시켰다. 1901년 총병력은 3만 명을 넘었다. 1901년 이래 국방비는 국가예산의 절반에 육박했다.
대한제국은 병사들의 자질 면에서도 ‘군사강국’이었다. 1894년 오스트리아 작가 헤세-바르텍은 조선 병사들이 건장한 체격에 키가 1m75㎝를 넘었다고 기록하고, 1901년 독일 기자 지크프리트 겐테도 건장하고 훤칠한 한국군의 신식 복장은 “다리가 짧은 일본군”의 복장보다 “훨씬 잘 어울렸다”고 쓰고 있다.
당시 아시아에서 일본 외에 3만 명의 신식 군대를 가진 나라는 없었다. 청국의 신식 군대는 왜군과 러시아군에 연패해 소멸한 상태였다. 대한제국은 3만 군대를 배경으로 1900년 울릉도·독도를, 1903년에는 북간도를 행정구역에 편입시켰다. 함북진위대와 간도관리사 이범윤의 ‘충의대’는 북간도에 거듭 침입한 청비(淸匪)들을 격퇴하고 간도를 지켜냈다. 이로써 고종은 광개토대왕 이래 최대 영토를 확립했다.
또한 대한제국은 ‘경제대국’이었다. 대한제국은 2236개소의 신식 학교와 무관학교·군사학교를 통해 근대적 산업역군과 신식 장병들을 길렀다. 또 시장제도를 창출하고 근대적 상공기업을 진흥했고, 서울의 도시계획과 교통통신체계도 확립했다.
그리하여 몇 년 사이에 한국은 괄목할 정도로 발전했다. 1901년 겐테는 서울이 “전신·전화·전차·전기조명을 동시에 갖춤”으로써 아시아 1위의 도시가 되었다고 하면서 중국인은 인력거를 타는데 한국인은 “전차를 타고 쌩쌩 달린다”고 썼다. 프리데릭 매켄지와 호머 헐버트도 입을 모아 “깜짝 놀랄” 한국의 발전을 말했다. 심지어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일본공사도 1900년 한국이 ‘상업시대에서 공업시대로’ 이행해 ‘세계적 경쟁’에 들어섰다는 비밀보고에 이어 1904년 무역이 ‘현저하게’ 발달했다는 보고를 본국에 올렸다.
앵거스 매디슨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를 보면, 대한제국은 고속 성장해 1911년 1인당 국민소득이 815달러에 달했다. 1915년에는 1048달러에 달해 일본(1430달러) 다음의 아시아 경제대국이 되었고, 그리스·포르투갈도 앞지르고 있었다. 1918년까지 일제는 한국에 전혀 투자하지 않고 약탈만 했다. 따라서 이 성과는 대한제국의 성장 관성에서 나온 것이다.
조선이 가난해 ‘자멸’했다거나 ‘근대적’ 경제성장은 일제 때야 개시되었다는 신(新)친일파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대한제국은 ‘자멸’한 것이 아니라 일제에 ‘패망’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광복전쟁을 통해 ‘대한민국’으로 부활했다. 대한민국은 국호·국화·국기·한국군·근대기업, 심지어 ‘한정식’ 등 대한제국의 거의 모든 것을 계승했다. 따라서 민족 정통성은 대한민국에만 있다. 이런 까닭에 대한제국의 폄하는 대민민국의 부정인 것이다.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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