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6년 3월 10일 영조가 세상을 떠난 지 엿새 만에 경희궁에서 즉위한 스물다섯 살 새 임금은 영조의 시신을 모신 빈전(殯殿) 밖에서 대신들을 만나 충격적인 선포를 한다. “과인(寡人)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할아버지 영조는 죽기 전 정조를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라 효장세자의 아들로 법통을 정리해 놓았다. 그런데 즉위 일성(一聲)이 바로 할아버지의 그런 방침을 뒤엎는 것이었다. 좋게 말해 역사청산, 실은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세력들에 대해 정치보복을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실제로 정조는 정치보복을 서둘렀다. 대가는 컸다. 이미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된 세력들은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다. 그래서 정조실록을 읽어보면 재위 10년이 될 때까지 대규모 반란이나 역모가 일어나지 않은 해가 없을 정도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미래보다는 과거를 향하겠다는 즉위일성이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세종과 대비해서 볼 때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정조의 친아버지 죽음만큼은 아니어도 세종의 비극 또한 만만치 않았다. 세종의 아버지 태종은 훗날 외척 세력의 발호(跋扈)를 사전에 막기 위해 세종이 즉위하던 그 해 겨울, 세종의 처가인 심온(沈溫) 집안을 초토화했다. 심온은 사약을 받았고 장모 안씨와 딸들은 노비가 됐다. 이 일은 태종의 의중을 간파한 영의정 유정현( 廷顯)과 좌의정 박은(朴訔)이 주도했다.
그러면 아버지가 상왕으로 있을 때는 유정현이나 박은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1422년 5월 10일 아버지 태종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세종은 이 두 사람에 대해 어떻게 했는지를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바로 그 점에서 정조와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묘하게도 심온의 라이벌이기도 했던 박은은 태종이 죽기 하루 전날 세상을 떠나 아예 화를 입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나 의금부 제조를 맡아 심온의 옥사를 주도하며 매질과 고문을 가한 유정현은 살아 있었다. 심지어 유정현은 세종의 부인 심씨를 폐비시켜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유정현은 계속 영의정 자리를 지키다가 세종8년 5월에 세상을 떠났다. 태종이 세상을 떠나고서도 무려 4년 동안 세종은 어쩌면 원한이 맺혔을 수도 있는 유정현을 영의정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우유부단해서였을까? 그저 아버지의 뜻을 존중하려는 단순한 효심 때문이었을까?
세종은 정조와 달랐다. 정조가 즉위할 때 스물 다섯이었다면 세종도 즉위할 때 스물 둘, 상왕으로부터 홀로서기를 할 때 스물여섯이었으니 거의 비슷했다. 그런데도 인간됨과 공부의 깊이가 달랐다. 세종은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의 깊은 뜻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경우에 3년이 지나도록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보여준 도리를 조금도 잊지 않고 따른다면 그것은 효(孝)라고 이를 만하다.”
세종은 이를 그대로 따랐다. 그랬기에 심온과 다른 입장에 있던 많은 신하들조차 마음을 바꿔 세종에게 충성을 다했다. 물론 어설픈 보복으로 인한 분열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자신의 원한을 눌렀기에 조정은 화합했고 그것이 훗날 세종의 태평성대를 이룩하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세도정치라는 난세의 문을 자기 손으로 연 정조와는 비교조차 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여야(與野)가 전(前), 전전(前前), 전전전(前前前) 정권을 거슬러 올라가며 난투극을 벌이려 하고 있다. 세종 15년 2월 29일 세종이 남긴 말을 양쪽에 다 들려주고 싶다.
“억지로 남의 잘못을 찾아내는 것은 정치하는 체통이 아니다.”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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