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통치 합리화 위해 일제가 대한제국 무능한 나라로 왜곡"
"대한제국 바로알기는 동아시아, 세계사 전체의 문제"
"건국절 논란도 근현대사 제대로 정립못해 벌어진 불필요한 논란"
12일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 학술대회도 열려
120년 전 오늘이었다. 고종 황제는 근대국가의 시발점인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그는 ‘국가(國家)’라는 말보다 ‘민국(民國)’이란 용어를 더 즐겨 쓰던 군주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고종이 나라를 지칭하며 ‘국가’ 대신 ‘민국’이라 부른 예가 70%나 된다. 당시 고종을 직접 인터뷰했던 선교사들이 남긴 글에는 ‘고종 황제는 나라에서 지식이 가장 높은 인물이다. 신하들이 잘 모르는 게 있으면 군주를 찾아가 물어볼 정도였다. 고종 황제는 그 자리에서 즉답을 하거나 무슨 책을 찾아보라고 일러주었다’고 돼 있다.
-대한제국은 어떤 나라였나.
“식민통치의 합리화를 위해서였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에 대한제국의 근대화는 자력으로 이미 진행 중이었다. 일제는 그걸 부인해야 했다. 조선이 괜찮은 나라였다면 식민지배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래서 ‘망국책임론’이란 프레임을 씌웠다.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고종 정부의 무능함, 둘째는 유교 사상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것이다. 구시대 사상인 유교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는 야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게 식민주의 역사학의 가장 큰 굴레다. 자신도 모르게 우리는 대한제국의 존재를 애써 외면하거나 무시해오지 않았나.”
-고종 황제가 평소 ‘국가(國家)’ 대신 ‘민국(民國)’이라 지칭한 건 어떤 의미인가.
“조선의 근대화, 그리고 중립국 승인이었다. 당시는 일본과 청, 러시아와 영국 등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그걸 뚫고 가려면 덴마크나 벨기에, 스위스처럼 국제사회에서 중립국 승인을 받아야 했다. 우선 근대국가로서 위상을 갖추어야 했다. 1880년대 처음에 전기는 경복궁에만 들어왔다. 고종은 도시개조 사업을 통해 서울 시내에도 전깃불이 들어오게 했다. 전차를 시설할 때는 내탕금 20만원을 선뜻 내놓았다. 근대화한 자주독립국가로 국제사회에 데뷔하고자 했다. 실제 고종의 중립국 승인 외교는 비밀리에 강하고 치밀하게 펼쳐졌고, 뒤늦게 이를 안 일제의 방해공작이 집요하게 이어졌다. ‘대한제국’이란 국호도 고종 황제가 직접 지었다.”
-왜 ‘대한제국’이라 지었나.
“아니다. 그 역시 식민사학의 관점이다. 을사보호조약이나 병합은 군사강점이었다. 대한제국의 국가원수는 끝까지 그걸 인정하지 않았다. 1919년 고종이 독살되자 장례식 이틀 전에 3ㆍ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 정신이 상해임시정부로 이어졌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면서 대한제국을 승계했다. 1945년 일제 압제에서 벗어나 48년에 정부수립을 다시 한 것이다. 대한제국 바로 알기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문제이자 세계사 전체의 문제다.” 이태진 명예교수는 12일 오전 9시30분 서울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는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에서 대한제국의 외교전략을 분석해 발표한다.
글=백성호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vangogh@joongang.co.kr
◇이태진 교수=서울대 사학과 졸업, 서울대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석ㆍ박사,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역임, 국사편찬위원장 역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저서로 『일본의 한국병합 강제 연구』『끝나지 않은 역사』『동경대생에게 들려준 한국사』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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