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10.18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1967년 8월 29일 이른 아침. 윤무병 국립박물관 학예관은 김원룡 서울대 교수 등과 함께 대전시교육청을 찾았다.
그곳엔 7월 초 대전 괴정동에서 밭을 갈던 주민이 '캐낸' 유물 12점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는 동검이나 청동거울처럼 눈에 익숙한 것도 있었지만 방패모양, 칼 손잡이모양, 둥근 뚜껑모양을 한 청동기 등
국내에서 처음 확인된 것도 여러 점 포함되어 있었다.
방패모양 청동기, 대전 괴정동 유적, 길이 16㎝, 국립중앙박물관.
일행은 발굴 작업을 위해 유물이 발견된 곳으로 서둘러
이동했다. 현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 그들을 기다렸고
유물이 발견된 구덩이는 다시 메워져 있었다.
오전 10시쯤부터 발굴을 시작해 표토를 제거하자 곧 무덤의
윤곽이 드러났다. 흙을 조금씩 제거하며 혹시 유물이 섞여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에서 몇 점의 유물을 찾아냈고 조사는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윤 학예관은 이 무덤에서 출토된 동검이 세형동검 가운데
가장 오래된 형식으로 기원전 4세기 무렵 제작되었을 것으로
파악했다. 이어 그 시기가 되면 요녕식 동검을 사용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한반도적인 청동기 문화가 새롭게
개시되었고, 그때 등장한 청동거울, 작은 종모양 방울,
방패모양 청동기, 칼 손잡이모양 청동기, 둥근 뚜껑모양
청동기 등은 제사장의 소유물이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괴정동 유적 출토품은 그 시기의 정치적 군장이 제사장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음을 웅변하고 있다.
괴정동에서 우연히 발견된 이 청동기들은 한국 청동기
문화의 성격을 잘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아
1976년에 일본, 1979년에는 미국에서 열린
'한국 미술 5000년 전' 출품 유물로 선정되어 해외 나들이를 했고,
당시 언론들로부터는 '국위 빛낸 민족문화의 정수'로 평가받기도 했다. 1976년 아산 남성리, 1978년 예산 동서리,
2016년 군산 선제리에서 유사한 유물이 출토되었지만 괴정동 청동기들은 발굴 50주년을 맞이한 지금도 여전히
한국식 동검 문화를 대표하는 명품으로서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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