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11.01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2007년 5월 25일. 고령 지산동73호분에 대한 발굴이 시작됐다.
순장묘로 유명한 지산동44호분과 45호분 발굴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대가야박물관이 기획한 조사였다.
조영현 대동문화재연구원장은 감회가 남달랐다. 지산동45호분 발굴에 참여한 인연으로 옛 고분 연구에 평생을 쏟아온
그였기에 지산동고분군에서 왕릉급 무덤을 발굴하게 된 것은 가슴 벅찬 일이었다.
금동제 관식, 지산동73호분, 높이(중간) 18㎝, 대가야박물관.
발굴의 정밀도를 높이기 위해 구조물을 만들고 그 위에 엎드려 무덤 내부를 노출했고
무덤 속에서 조사를 진행할 때는 유물의 안전을 위해 바닥이 말랑말랑한 고무신을
신었다. 발굴은 당초 예정 기일을 넘겨 다음 해까지 이어졌다.
그 사이 지름 23m, 잔존 높이 3.4m에 달하는 이 무덤은 5세기 전반에 축조된 것으로
기왕에 발굴되었던 대가야 왕릉급 무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임이 밝혀졌다.
그런데 그 시점까지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아 있었다.
지산동44호분에서 32개의 순장곽이 확인되었음에 비해 이 무덤에서는 겨우 1개가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 의문은 곧 풀렸다.
내부 조사 종료 후 묘광과 목곽 사이에 채워진 돌무더기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숨겨져 있던 3개의 순장곽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특히 서쪽 순장곽에 묻힌 30대 남성의 머리에서는 금동제 관식이 출토되어 주목을 받았다.
조 원장은 "신라 관식과 외형이 유사하며, 이러한 장식품을 소유한 순장자는 사회적 지위가 낮지 않았고 무덤 주인공과
매우 가까운 인물이었을 것"이라 해석했다.
새가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모습을 한 금속제 관은 중국 역사가들이 동이(東夷)의 특징으로 기록한 '조우관(鳥羽冠)'에
해당한다. 고구려에서 유행한 조우관이 남쪽으로 전해져 신라뿐만 아니라 가야에서도 유행했음을 지산동73호분 금동제
관식이 잘 보여주었다. 지산동고분군에서는 그 밖에도 백제와 신라적 요소가 부분적으로 녹아든 유물이 다수 발굴됐다.
가야가 다른 나라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 자기화하였음을 생생히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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