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시스 강진구 기자 |
세계에서 가장 오래 존속한 왕국은 아프리카 수단 누비아 지역의 쿠쉬왕국(BC 1000년경~AD 350년)이다. 유럽에서는 로마가 동·서로 분열돼 생겨난 비잔티움제국(AD 330년~AD 1453년)이, 아시아에서는 신라가 가장 오래 존속한 나라로 꼽힌다. 경주역사유적지구는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다양한 불교 유적이 있는 남산지구, 고분이 많은 대릉원지구, 불교 사찰 유적지인 황룡사지구, 방어용 산성이 위치한 산성지구, 그리고 옛 왕궁 터였던 월성지구가 포함됐다.
성의 모양이 초승달처럼 생겼다 해서 반월성 또는 신월성이라 불렀다. 5대 파사왕 22년(AD 101년)에 축성을 시작해 30대 문무왕 때 안압지·임해전·첨성대 일대 편입으로 성의 규모가 확장됐으며 56대 경순왕(AD 935년)까지 궁성으로 사용했다.
◆천년 역사서 전세계 전파
단군 이래 가장 부강한 국력을 갖췄다고 하지만 1970년대 한국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콩고보다 적었다. 역사를 거슬러 화려한 번영을 누린 시기를 찾자면 삼국통일 이후인 신라시대가 꼽힌다. 천년 왕국 신라 역사를 담은 역사서가 영어·중국어·일본어로 번역돼 지난 5월부터 전세계로 전파되고 있다. 신라사를 전세계에 알리는 작업이 이제라도 시작돼 뒤늦은 감이 들지만 다행이다.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지난 5월 경주 월성 성벽에서 약 1500년 전 제물로 묻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 뼈 2구가 거의 온전한 형태로 발굴됐다고 발표했다. 발굴된 인골은 그 시대 사람의 체질적 특성, 인구 구조, 건강상태, 유전적 특성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월성 발굴조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공약인 신라왕경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15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번 발굴에서는 흙으로 빚은 사람과 동물 등 다양한 형상의 인형(토우), 간지가 적힌 목간, 생활도구, 건축재료, 돼지, 동물뼈, 여러 식물유체도 함께 발견돼 월성의 역사적 가치가 확인됐다.
사람 형상 토우에는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이슬람 문화권 양식의 상의를 입은 모습도 있었다. 중앙아시아 이란 계통 소그드인의 옷과 유사한 모양이다. 출토된 목간에서는 병오년(丙午年)이라는 구체적 시기, 신라 왕경 내 가장 이른 시기의 이두로 판단되는 글자도 발견됐다. 경주가 아닌 지방 주민의 관직과 노동을 뜻하는 글자도 적혀 있었다. 신라시대 때 문자활동이 활발했고 중앙정부가 지방 노동력을 동원할 만큼 통제력이 강했다는 사실 등이 확인됐다.
발견된 식물 자료 중 가시연꽃은 희귀식물로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그 시절 물의 흐름, 깊이, 수질 등을 추정할 수 있다. 곡류, 채소류, 과실류의 씨앗도 양호하게 보존돼 당시 식생활을 복원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출토된 인골 중 하나는 하늘을 향해 똑바로 누워 있었고 또 하나는 얼굴과 팔이 다른 인골을 향해 있었다. 인골에는 결박이나 저항의 흔적이 없어 튼튼한 성벽을 쌓기 위해 제물로 바쳐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중국 상나라에서는 기원전 1000년 이전에 주거지나 성벽을 쌓을 때 사람을 제물로 쓰는 풍속이 성행했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 고려사에도 ‘왕이 민가의 아이를 잡아다가 새로 짓는 궁궐의 주춧돌 아래 묻는다’라는 이야기가 항간에 돌았다는 기록이 있다.
주춧돌 아래 사람을 묻으면 궁궐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 같다. 연구소는 월성에서 출토된 인골의 형태를 통해 사망 후 축조 현장에 묻은 것으로 판단한다. 이번 발굴로 인주(人柱) 설화가 사실일 가능성이 커졌다.
◆세계 모든 종의 걸작 '에밀레종'
인주 설화가 사실이라면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과 관련된 인신공양 설화도 일부 사실일 가능성이 대두된다. 설화는 끔찍하고 기록에는 나오지 않아 허구로 여겨졌다. 종 만드는 작업이 계속 실패하고 소리가 나지 않아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는데 스님 꿈에 시주를 받지 못한 집 아이를 쇳물에 넣으란 말이 들렸다. 며칠 전 들른 어떤 집에서 "시주할 것이 없으니 원하면 아이라도 데려가시오"라고 문전박대한 것이 생각났다. 아이를 시주 받아 쇳물에 넣어 종을 만들었더니 종이 완성됐다는 이야기다. 비천상의 공양하는 모습이 슬퍼보이고 종 소리는 마치 어린아이가 어미를 탓하며 우는 소리 같아서 ‘에밀레종’으로 불렸다.
인신공양설 사실 여부가 궁금하면 사람 뼈의 성분인 인(燐)이 들어있는지 분석해볼 수 있다. 국내 한 연구기관은 에밀레종에서 어린아이 유체 분량 정도의 인이 검출됐다고 40여년 전에 발표했다. 그러나 이후 다른 연구기관이 에밀레종 여러 부분에서 채취한 시료를 극미량 원소분석기로 분석했을 때는 인 성분이 검출되지 않았다. 그러나 구리를 뜨겁게 녹인 용액에 인골을 넣으면 분해된 유체가 위로 떠서 제조과정에서 불순물 제거시 인 성분이 없어질 수도 있다.
통일신라 전성기 성덕왕의 아들인 경덕왕이 부친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기 시작한 종은 아들인 혜광왕 때(771년) 완성됐다. 예술적으로 후대 그 어떤 종보다 높게 평가받는다. 종의 외곽 곡선이 유려하며 종 치는 부분에 연꽃과 비천상이 독창적 문양으로 새겨졌고 조각 수법이 뛰어나다. 한국 최대의 범종인 에밀레종은 높이 3.5m, 무게 18.9t에 달하는 거대한 원형을 1300년 이상 잘 보존하며 끄떡없이 견뎌왔다.
당시 금속 종의 제조기술이 세계적이었음을 말해준다. 세계에서 가장 큰 종은 러시아에 있는데 만드는 과정에 깨져서 한번도 울려보지 못한 채 크렘린궁에 깨진 조각과 함께 전시돼 있다. 미국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에 있는 자유의 종도 금이 간 상태다.
에밀레종은 세계 모든 종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끊어질 듯 작아지다가 다시 은은하게 이어지는 저음의 소리가 몇분 반복된다. 종의 각 부분에서 다른 진동수의 소리가 나오면서 파동들이 간섭되고 상대적으로 느린 새로운 주기로 진폭이 변화하면서 긴 여운이 생긴다.
물리학에서는 두개의 파동이 간섭을 일으켜 새로운 합성파가 만들어지는 것을 맥놀이 현상이라고 한다. 에밀레종을 본떠 조선시대에 만든게 보신각인데 에밀레종의 신비한 소리에는 못 미친다.
‘신라소리축제 에밀레전’이 지난달 13일부터 15일까지 첨성대 잔디광장 일대에서 펼쳐졌다. 한국 전통 종 양식을 비롯해 일본·중국·유럽 등 전세계 다양한 종 500여개를 만나볼 수 있었다. 4t 규모의 ‘에밀레 모형종 타종’은 장엄한 소리의 울림을 직접 느낄 수 있어 인기를 끌었다. 신라 문화유산 100여개를 최첨단 3D 홀로그램 기술로 재현한 판타스틱 쇼, 각종 불교 체험 행사, 신라 금관 만들기, 신라 왕과 왕비 옷 체험, 국악 무대 공연, 한국 전통 등의 효시인 신라시대 간등을 재연한 행사 등이 진행됐다. 대형 전통 등 수십개와 LED 대종이 첨성대와 함께 은은한 야경을 연출했다. 돌담길 비추는 연등길을 가족·연인·친구와 걸으며 아름다운 추억을 쌓는 사람들도 있었다.
2012년 이후 매년 열리면서 지역 대표 문화 콘텐츠로 부상한 에밀레전을 천년 신라문화와 함께 세계 널리 홍보하면 한민족의 우수성을 알리는 동시에 해외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다. 에밀레종에 얽힌 설화의 사실 여부는 중요치 않다. 관광에서는 스토리가 있으면 흥미가 더해져 관광객이 많아진다. 심지어 덴마크 코펜하겐의 인어 동상, 독일의 로렐라이 언덕 등은 그냥 보면 별 것 아니지만 스토리텔링의 마력 때문에 관광명소가 돼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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