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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로 읽는 세상] 삶은 혹시 꿈이 아닐까

바람아님 2017. 11. 7. 09:37

(조선일보 2017.11.07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사랑하는 마음도 佛家에선 '업'
스님 조신과 강릉 태수의 딸, 애태우다 함께 살지만 현실은… 깨어보니 모두 하룻밤의 꿈
배우 김주혁, 기억에만 남으니 삶은 한낱 실체 없는 꿈 같구나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라흐마니노프를 자유롭게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김진호가 교회 지인 몇 명을 집으로 초대했다.

가까이서 듣는 연주는 더욱 환상적이다.

돌아와 생각하니 꿈길을 걸은 것 같기도 하고, 꿈길에서 세포들이 춤을 춘 것 같기도 하다.

우리의 욕망이 시작하는 그곳을 건드리는, 매끈한 생명의 춤, 업의 춤!


불가(佛家)에서는 사랑에 빠지는 마음마저 업이고 고뇌다.

그런데 그 마음을 고뇌라 느끼지 못하는 건 좋아하기 때문이다.

콩깍지가 씐다고 하지 않나? 좋아해서 어두워지는 것이다.

좋아해서 어두워지다니? 불교에서 천상은 그런 곳이다.

즐거움이 넘치나 아직 열반에 이르지는 못한 존재들의 세계! 물론 천상이 목적이 아니다.

즐거움도 궁극이 될 수 없으니. 즐거움이 쉽게 고뇌로 바뀌는 건 즐거움과 고뇌가 짝이란 얘기다.

매혹되어 고뇌를 고뇌라 느끼지 못하고 욕망을 욕망이라 느끼지 못하는 것뿐이다.

즐거움이 고뇌보다 어려운 이유는 불의(不義)에 저항하기보다 유혹에 저항하기가 어려운 이유와 같다.

그 달콤함 때문에 욕망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게 되는 것. 그러니 욕망의 춤, 생명의 춤은 업의 춤이다.


그 집에 다녀온 후 갑자기 삼국유사의 조신이 확, 이해됐다. 조신을 아나?

이루지 못하는 사랑의 갈증으로 애를 태우다 마침내 사랑하는 이의 품속에서 꿈을 꾸게 된 남자.


원래 조신은 스님이었다. 낙산사에서 도를 구하던 스님은 어느 날 강릉 태수의 딸을 보고 한눈에 반해버린다.

삶에 지름길이 없듯 진리에도 지름길은 없나 보다. 고통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기는 쉽다.

그러나 황홀한 사랑이 욕망하는 것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기에 조신은 너무 젊었다.

조신은 욕망이 시키는 대로 낙산사 부처님께 나아가 그 처자와 살고 싶다고 빌고 빌었다.

그런데 처자는 다른 곳에 혼처를 정했단다.


[신화로 읽는 세상] 삶은 혹시 꿈이 아닐까/이철원 기자


탈 대로 다 타지 못하는 마음이 얼마나 기막혔을까?

그는 뜨겁고 괴로워 정처를 찾지 못하고 유랑하는 마음으로 부처님 앞에 나왔다. 그리고 울고 또 울었다.

눈물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을까? 기적이 일어난다. 여인이 찾아온 것이다.

여인은 나도 당신을 사랑했다며, 싫은 혼인을 할 수 없어 당신을 찾아 이렇게 도망쳐왔다고 한다.

이제 돌아갈 곳이 없다며 같이 살자고까지 하는 처자로 인해 조신의 심장은 얼마나 쿵쿵 쾅쾅 뛰었을까. 비록 가진 것

없었어도 건강한 몸이 있고 서로 아껴주는 마음이 있으니 비가 새는 흙집에 살면서도 너무나 행복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여자와의 삶을 위해 땅을 일구고 아이를 낳고 소박한 밥상을 앞에 놓고 행복한 미소를 짓던 그들이

언제부터 애타는 사랑을 잃어버리고 서로의 존재를 부담으로 느끼게 됐을까?

어느새 젊음은 저만치 가고, 젊음이 멀어져가니 쇠약해지고, 병들고, 자신감도 사라지는데, 춥고 배고픈 생활고가 덮친다.


바람이, 세상이, 가난이 그들의 삶을 방해한다.

사랑으로 낳은 소중한 아이는 어느덧 다섯이나 됐는데 살림은 궁색하기 이를 데 없다. 큰 아이들은 구걸을 다니고,

작은 아이들은 배고프다고 운다. 그러다 마침내 구걸 나갔던 아이가 개에게 물리고, 열다섯 큰아이는 굶어 죽었다.

고운 사랑이 시켜 한 일이 이렇게 거친 삶으로 변할 수 있을까?

굶어 죽은 아이를 묻으며 울고 또 울다 결심한 여인이 결단한다, 이제 헤어지자고.

고운 얼굴, 아름다운 미소도 풀잎의 이슬이요, 지란(芝蘭) 같은 약속도 허망하다고.

한때 그지없었던 사랑이 팍팍한 생활 속에 서로의 삶의 걸림돌이 됐다고, 여인이 정말 정리를 잘한다.


여인이 그렇게 정리해주니 이를 어쩌나, 조신은 반가워했단다. 기막힌 것인가, 솔직한 것인가?

이제 가족은 흩어진다. 독한 현실, 아픈 이별, 생이별이다.

울고 싶지만 눈물도 말라버린 상황에서 조신은 배고파 걷지도 못하는 아이를 업고 걷다가 힘이 빠져 길거리에서 쓰러진다.

사랑도 허망하고 이별도 허망하고 삶도 허망하다. 그때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라고.

삼국유사는 그것을 조신의 꿈이라 한다. 깨어보니 법당이고 하룻밤 꿈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짜 그것이 꿈이었을까? 혹 삶이 꿈인 것은 아닐까?


배우 김주혁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한동안 먹먹했다.

죽음이 어울리지 않는 나이, 갑작스러운 죽음은 철렁, 마음을 흔든다.

그를 좋아하고 기억하는데 그는 여기 없기 때문이다. 꿈이란 그런 것 아닌지. 기억은 있는데 실체는 없는 것!

지나간 사람, 지나간 사랑,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보며 생각한다.

삶이 꿈과 다르지 않다고, 혹 삶이 꿈인 것은 아닐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