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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의 퍼스펙티브] 한국호의 순항은 통치의 정교함에 달려 있다

바람아님 2017. 11. 11. 09:07


중앙일보 2017.11.09. 01:01

 

보수 지리멸렬로 진보 동력 얻어 발 빠른 속도전으로 개혁 추진
최저임금 인상과 복지 확대 통해 양극화·불평등 해소에 일부 성과
절실한 복지·성장 선순환 위해 재벌 구조개혁과 노조 양보 필수
노사정 합의체제로 갈등 줄이고 시민정치 활성화로 합의 유도해야


━ 문재인 정부 6개월 진단

내일이면 문재인 정부 출범 6개월이다. 처음에는 망가진 국가 기능을 회복하는 것도 어렵겠다는 생각이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우려도 많다. 검증 과정 없는 정책 실행, 코드 인사, 위태로운 외교 전략 등이 그렇다. 한국을 방문한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로 초점을 돌렸다. 그는 미국의 공격적 전략에 어깃장을 놓는 한국이 미덥지 않다. 그럼에도 일상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국가가 정상 기능을 회복하고 있다. 적어도 비상식과 반칙이 현실 생활을 지배할 두려움은 사라졌다. 국가와 권력을 가둔 폐쇄회로를 함께 걷어냈다는 공유 체험이 준 선물이다. 주권 회복의 자신감과 대중 심리의 안정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문재인 정권은 일단 평균 이상의 점수를 받았다.


통치철학의 전환

보수가 지리멸렬할수록 문재인 정권의 행보는 더욱 뚜렷해진다. 건강한 견제와 협치가 소멸하기 때문이다. 지지율을 독식한 여당의 개혁 동력이 만만치 않다. 집권 6개월 만에 현 정권은 한국호(號)의 항로 변경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촛불광장의 염원에 맞춰 통치철학을 다듬었고, 보수 일변도인 국가 운영 기조와 정책 이념을 중도 쪽으로 끌어당겼다. 얼마나 좌편향할지는 여전히 우려다. 특정 영역에서는 발 빠른 추진력을 보였다. 양극화와 불평등의 진앙지로 진입해 몇 개의 중요한 뇌관을 제거했다. 최저임금, 정규직 약속, 복지 확대, 성과연봉제와 해고 조항 폐지 등. 저항세력이 약할 때 밀어붙인 일종의 속도전이었다. 급속한 결단이 초래할 부작용이 정책 목적 자체를 뒤집을 우려를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15년 전 4대 개혁을 내걸었던 노무현 정권이 보수 세력의 집중 포화로 휘청거렸던 악몽이 반면교사였을 것이다.

퍼스펙티브 문재인 정부 6개월 진단
문재인 정부의 초기 정책들은 세 종류로 묶인다. ①국가 기능의 정상화 ②소통정치 활성화 ③양극화와 불평등 해소. 30년의 민주화 노력에도 불거진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야말로 정·관·재(政·官·財) 비리 협업의 끝판이었다. 비리 연고망을 들어내고 권력 남용을 심판대에 세웠다. 공공기관을 겨냥한 전방위적 사정 조치가 무너진 공기능을 얼마나 경신할지는 미지수이지만 시민적 신뢰 회복에는 효과적이다. 청와대는 나홀로 관저를 버리고 광장으로 돌아오는 중인데, 국회는 구태를 벗지 못했고 협치는 행방이 묘연하다. 집권 초기 가장 공을 들인 영역이 양극화와 불평등 해소다. 당장 대통령 행정명령으로 집행 가능한 정책들을 전광석화처럼 해치웠다. 재벌 대기업에 대한 공세가 거세지고, 친노동 정책이 추진됐다.

촛불광장이 소망했던 바는 ‘나라다운 나라’ ‘새로운 국가’였다. 국정 100대 과제가 그런 집합적 소망을 분산적으로 담고는 있지만, 통치철학의 전환을 이뤄 내려면 두 가지 중심축을 더욱 다듬어야 한다는 사실을 짚고 싶다. ①공정성 개념 ②성장 동력의 사회적 생산론. 정치민주화를 넘어 사회민주화로 나아가는 관문에 해당한다.


공정성 개념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한국에서 100만 부 이상 팔렸다. ‘사회 정의’에 굶주렸다. 지난 10년간 경제성장률은 3~5%를 맴돌았고 현재 하향 추세다. 그래도 소득은 늘었는데 불평등은 줄지 않았다. 지니계수는 0.34 선에서 상승, 소득 5분위 배율은 악화됐다[표 1]. 금융·토지 소유를 합하면 지니계수는 0.4를 넘을 것이다.


임금생활자 중 월 200만원 이하가 절반을 차지하고, 도심을 뛰는 택배·대리기사·운송기사가 200만 명에 이른다. 밤샘작업 노동자는 경제활동 인구의 15%(약 200만 명), 주 52시간 일하는 장시간 노동자는 30%(약 400만 명)에 달한다. 불과 4년 전의 모습인데, 오늘날 얼마나 달라졌을까? 흙수저론이 횡행해 청년세대의 꿈을 부쉈다. 공정성은 어디에 있는가?


광장의 함성에 문재인 정권은 ‘정의로운 대한민국’으로 화답했다. 정의란 곧 공정성(fairness)이다. 선진국에서 ‘공정성 투쟁’은 1인당 국민소득 1만~2만 달러 수준에서 일어난다. ‘공정성 투쟁의 경제지대’를 벌써 통과한 한국은 어떤 획기적 결실도 맺지 못한 채 꾸물댔다. 존 롤스의 ‘일원적(一元的) 사회정의’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이게 나라냐?’를 물어야 한다.


문재인 정권의 행보는 롤스의 사회 정의 개념에 근접한다. ‘공정성의 재정립’이다. 새로운 것도 아니다. 롤스는 소득에서 ‘기회균등의 원리’와 부(富)의 분배에서 ‘차등의 원리’를 제안했다. 사회적·경제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의 균등 분배를 실행하는 것, 하층에 최대의 수혜가 돌아가도록 부를 차등 분배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려면 세금 인상과 함께 모든 국민이 소득을 내는 개세(皆稅)주의가 필요하다. 복지 수혜자는 공익에 헌신하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 납세자와 수혜자 간의 신뢰가 그렇게 생겨난다. ‘절망과 체념의 사회화’가 고착되는 것을 막는 시급한 사회개혁이 이것이다.


필자는 소득주도성장론의 취지를 공정성 관점에서 이해한다. 여기서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 첫째, 기회 균등과 차등 분배의 수위를 조절하는 것인데, 누구나 납득할 ‘응분의 몫’이 어느 정도인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일본은 하청기업의 임금이 원청의 70% 정도라면 대체로 납득한다. 둘째, 도를 넘으면 현 정권이 의욕적으로 내세운 성장·고용·복지의 ‘황금삼각형’이 망가진다. 분배는 반드시 필요한데 실력을 넘는 과잉 복지, 과도한 노동 경직성은 세 개 목표 중 어느 하나를 버려야 하는 난처한 상황(트릴레마, Trilemma)을 초래한다. 현 정권이 남발하는 노동경직성을 부추기는 조치들이 그러하다. 일자리 창출을 훼손하는 전략이다.


성장 동력의 사회적 생산

세계 시장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서 경제 성장은 사회제도의 함수가 됐다. 세계화는 국내 경제에서 양극화와 분배 악화를 초래한다. 정부가 이 충격을 완화하는 정책수단을 개발해야 성장을 지속가능하게 만든다. 소득·고용 불안정, 실업, 분배 투쟁 등 각종 불안정이 성장 동력을 파괴한다. 성장 동력의 사회적 생산론, 한국은 이 국가적 과제를 피했다.


경제 성장 모범국가로 꼽혔던 한국은 일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에서 2만 달러에 도달하는 시간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군 중에서 호주·캐나다 다음으로 길었다. 무려 1994~2006년까지 12년 걸렸다[표 2]. 호주와 캐나다는 ‘공정성 투쟁의 경제지대’에서 분배·복지제도를 적극 도입하고 노동시장제도를 정비했다. 정권이 좌·우파로 자주 갈린 한국은 이념 투쟁이 격화되면서 분배 개혁을 놓쳤다. 경제 활력을 촉진할 제도적 인센티브가 왜곡된 상황에서 잠재성장률은 급격히 하락했다. 한국은 사회제도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 ‘격차사회(gap society)’다.


모든 정권이 ‘복지와 성장의 선순환’을 말했지만 한국적 방정식을 수립하는 데는 실패했다. 분배로 비중을 옮기는 게 절박한데 ‘어떤 방식인가’ ‘어느 정도인가’의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현 정권의 친노동·친분배 정책은 패러다임 전환에 맞는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하다. 그런데 무작정, 어떤 영역에나, ‘기울어진 운동장’론을 들이대는 것은 모험적이다. 현 정권의 정책 능력은 탁월하거나 정교해 보이지 않는다.


촛불광장이 원하는 ‘새로운 국가’

그래서 ‘새로운 국가’가 무엇인가를 다시 물어야 한다. 혹자는 ‘공화주의’라고 하고, 다른 이는 ‘시장주의’라고 말한다. 필자는 ‘다원적 합의체제’라고 하겠다. 공화주의는 법에 의한 지배다. 최순실 사태는 공화주의가 실패했음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법 운영 집단과 권부를 견제하고 감시하지 못했다. 불평등에 대한 법적 통제는 한계가 있다. 시장주의는 감시 비용은 낮지만 강자의 전횡과 무임승차를 막기 어렵다. 독점이 생겨난다. 그래서 ‘사회적 합의체제’가 중요해진다. 감시 비용과 무임승차, 독점을 줄이는 최선의 방법이 합의에 의한 사회적 신뢰다. 신뢰는 공익에 대한 긴장감에서 출발해 사익의 양보와 자제를 종착역으로 설정한다. 공익 창출을 위한 십시일반의 양보다. 재벌만 몰아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독점이익을 좇는 노조에도 자제를 명령해야 한다. 재벌의 구조개혁, 노조의 임금 양보 없이 현 정권이 추구하는 황금삼각형은 결코 성취되지 않는다. 그런 원칙하에 노사정 합의체제가 작동해야 성장 동력의 사회적 생산기제가 만들어진다. 부문별로 합의체제를 구성해 최저임금 인상률을 책정해야 옳았다.


혹자는 사회적 합의에 필요한 직접민주주의가 지배구조를 약화시키고 다수의 횡포를 불러들인다고 우려한다. 아니다. 대의민주주의의 허점을 메우는 보완기능이다. 이것이 촛불정신이다. 순서는 엇갈렸지만 탈원전 시민회의에서 그런 모습을 목격했다. 국가 존망을 결정할 중대 정책들을 선별적으로 논의에 부칠 수 있다. 시민정치의 활성화가 사회적 합의체제를 만들 전제요건이자 촛불광장의 준엄한 명령이다.


시민정치는 어떻게 이뤄지는가?

시민운동과 시민단체에의 가입이다. 시민 주권은 시민단체 회원권을 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시민 책무다. 사회적 합의는 지역단위 작은 단체로부터 전국적 단체에 이르는 긴 통로를 통과해 도출된다. 최종 수준에는 단체 대표들이 모여 최종 결정을 내린다. 시간이 걸리지만 단단하다. 가정(家庭)에서 광장에 나오는 도중에 여러 유형의 단체들이 포진해야 하고, 여기에 시민들의 참여가 요청된다. 한국 성인들의 시민단체 참여율은 겨우 3%다. 서울시 성북구와 은평구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는 주민자치는 희망이다. 동행(同行)과 동행(同幸)을 기치로 내건 성북구청은 마을민주주의를 시민자치로 끌어올리는 매우 뜻깊은 실험을 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미시적 기초다. 문 대통령이 말한 ‘지방자치시대 선언’도 그런 뜻과 부합한다. 어떻게 활성화할까는 현 정권의 과제다.


노무현 정권은 실력 이상으로 개혁을 밀어붙이다 침몰했다. 보수당의 침체로 문재인 정권의 항해는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워낙 단단한 사회적 보수 정서를 어떻게 달랠지가 변수다. 안보와 분배가 뇌관이다. 분배는 아직 재정 문제가 돌출하지 않아 저항심리가 그리 크지 않지만, 안보는 다르다. 안보심리의 교란은 이와 연관된 다른 쟁점을 동시에 촉발할 위험이 있다. 역풍이 커지는 것이다. 지난 6개월간 문재인 정권은 미진하나마 한국호(號)의 항로 변경에 성공한 듯 보인다. 순탄한 항해가 문제다. 통치의 정교함에 달려 있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