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데이]
입력 2017.11.19 00:02
국방 관련 업무 모두 원수부 귀속
대원수 고종이 계엄사령관 역할
실무 국장 직함을 총장으로 바꿔
원수부 총장이 각 부서에 지령
러시아 지원 받으며 병력 증강
1901년 무렵 한국군 3만 명 넘어
대한제국 무관학교 장교 476명
신흥무관학교-임정 광복군 이어져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가 명맥
자문 전문가와 기관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국립고궁박물관 대한제국관, 국립전주박물관
참고자료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황태연·청계·2017), 『고종시대의 재조명』(이태진·태학사·2000), 『미래를 여는 우리 근현대사』(한영우ㆍ경세원ㆍ2016), 『대한제국의 군사제도』(서인한·혜안·2000), 『구한말 육군무관학교 연구』(임재찬·제일문화사·1992), ‘고종황제의 독립운동과 러시아 상하이정보국’(최덕규·『한국민족운동사연구』81·2014), 『현대사 속의 국군』(박성수 외·전쟁기념사업회·1990), 『역사의 수레를 끌고 밀며』(지복영·문학과지성사·1995)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국방 관련 업무 모두 원수부 귀속
대원수 고종이 계엄사령관 역할
실무 국장 직함을 총장으로 바꿔
원수부 총장이 각 부서에 지령
러시아 지원 받으며 병력 증강
1901년 무렵 한국군 3만 명 넘어
대한제국 무관학교 장교 476명
신흥무관학교-임정 광복군 이어져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가 명맥
[대한제국 120주년] 다시 쓰는 근대사 <12> 비상계엄체제와 원수부
독립협회의 변란이 해소되고 나서야 비로소 대한제국은 항일 독립투쟁과 근대화 개혁을 본격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 항일 독립투쟁과 근대화 개혁은 ‘원수부(元帥府)’와 ‘궁내부(宮內府)’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경복궁에 있던 의정부가 조선시대 행정의 최고기관이었다면 원수부와 궁내부는 경운궁(현재 덕수궁)에 신설된 대한제국 행정의 실무적 중심이었다. 조선과 대한제국 시대가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이에 대한 이해는 대한제국의 기본 성격을 파악하는 핵심에 해당한다.
원수부와 궁내부 둘 중에 특히 먼저 주목해야 할 기관은 원수부다. 그런데 우리 국사교과서나 한국사 개설서에 궁내부는 어느 정도 서술하고 있어도 원수부는 그렇지 않다. 이름 정도 언급되거나 아예 거론조차 않는 경우가 많다. 대한제국에 대한 이해의 핵심을 빼놓은 셈이다. 궁내부가 서민 출신 이용익이 중심 역할을 하며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전반적으로 이끌었다면, 원수부는 국방 개혁의 중심이었다.
엄밀히 말해 원수부는 국방을 담당하는 하나의 부 단위를 훨씬 넘어섰다. 국방을 담당하는 부서라면 기존의 군부가 있었다. 그걸 뛰어넘는 ‘부서 위의 부서’로서 원수부를 창설한 것이다. 원수부는 일종의 계엄사령부 역할을 했다.
1899년 6월 2일 ‘원수부 관제’가 반포되었는데 실제는 1년 이상 준비를 거쳤다. 원수부 관제는 대한제국이 ‘비상계엄국 체제’였음을 확인시켜 준다. 제1관 제1조에서 국방·용병·군사(軍事)에 관한 모든 군령권을 원수부에 귀속시켰다. 제2조는 모든 군령을 대원수가 원수를 경유해 하달한다고 규정했다. 대원수는 고종, 원수는 황태자였다. 대원수는 계엄사령관이고, 원수부는 계엄사령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3조에서는 원수부를 황궁에 설치한다고 규정했다. 일제와 친일 개화파의 마수가 미치지 않는 경운궁 망명지에 원수부를 설치했던 것이다. 이로써 기존의 군부는 원수부를 지원하는 일개 부서로 격하되었다.
원수부와 궁내부 둘 중에 특히 먼저 주목해야 할 기관은 원수부다. 그런데 우리 국사교과서나 한국사 개설서에 궁내부는 어느 정도 서술하고 있어도 원수부는 그렇지 않다. 이름 정도 언급되거나 아예 거론조차 않는 경우가 많다. 대한제국에 대한 이해의 핵심을 빼놓은 셈이다. 궁내부가 서민 출신 이용익이 중심 역할을 하며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전반적으로 이끌었다면, 원수부는 국방 개혁의 중심이었다.
엄밀히 말해 원수부는 국방을 담당하는 하나의 부 단위를 훨씬 넘어섰다. 국방을 담당하는 부서라면 기존의 군부가 있었다. 그걸 뛰어넘는 ‘부서 위의 부서’로서 원수부를 창설한 것이다. 원수부는 일종의 계엄사령부 역할을 했다.
1899년 6월 2일 ‘원수부 관제’가 반포되었는데 실제는 1년 이상 준비를 거쳤다. 원수부 관제는 대한제국이 ‘비상계엄국 체제’였음을 확인시켜 준다. 제1관 제1조에서 국방·용병·군사(軍事)에 관한 모든 군령권을 원수부에 귀속시켰다. 제2조는 모든 군령을 대원수가 원수를 경유해 하달한다고 규정했다. 대원수는 고종, 원수는 황태자였다. 대원수는 계엄사령관이고, 원수부는 계엄사령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3조에서는 원수부를 황궁에 설치한다고 규정했다. 일제와 친일 개화파의 마수가 미치지 않는 경운궁 망명지에 원수부를 설치했던 것이다. 이로써 기존의 군부는 원수부를 지원하는 일개 부서로 격하되었다.
대한제국은 ‘비상계엄 상태 국내 망명정부’
원수부는 거듭된 관제 개정을 통해 위상이 계속 높아졌다. 1900년 3월 20일 관제 개정에서 국장의 호칭이 총장으로 바뀌었고, 원수부 총장에게 거의 ‘반(半)계엄사령관’이라 할 만한 높은 위상을 부여했다(『관보』8, 제1528호, 광무4년·1900.3.22.).
원수부 총장이 황제의 칙령을 받들어 각부 대신에게 ‘지령’할 수 있게 했고, 주임사무관(主任事務官)으로 하여금 ‘지조(知照·알려줌)’할 수 있게 했으며, 경무사·관찰사·한성부재판소 및 재판소 판사 이하 관원들에게는 직접 훈령·지령을 할 수 있게 했다. 원수부 총장의 위상은 단순한 국장직이 아니었던 것이다. 원수부가 대한제국 최고 권력기관이자 계엄사령부 같은 역할을 했음을 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원수부는 대한제국이 ‘비상계엄 상태의 국내 망명정부’였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법제라고 할 수 있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676~678쪽).
이 같은 원수부에 왜 그동안 많은 주목을 하지 않은 것일까. 사료도 있었고 부분적으로 연구도 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한제국 자체를 무시하고 폄하하는 자세가 우리 국사학계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기 때문에 사료가 있어도 보지 못하고 새로운 연구가 나와도 종합적으로 인용하지 않는 행태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원수부 총장이 황제의 칙령을 받들어 각부 대신에게 ‘지령’할 수 있게 했고, 주임사무관(主任事務官)으로 하여금 ‘지조(知照·알려줌)’할 수 있게 했으며, 경무사·관찰사·한성부재판소 및 재판소 판사 이하 관원들에게는 직접 훈령·지령을 할 수 있게 했다. 원수부 총장의 위상은 단순한 국장직이 아니었던 것이다. 원수부가 대한제국 최고 권력기관이자 계엄사령부 같은 역할을 했음을 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원수부는 대한제국이 ‘비상계엄 상태의 국내 망명정부’였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법제라고 할 수 있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676~678쪽).
이 같은 원수부에 왜 그동안 많은 주목을 하지 않은 것일까. 사료도 있었고 부분적으로 연구도 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한제국 자체를 무시하고 폄하하는 자세가 우리 국사학계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기 때문에 사료가 있어도 보지 못하고 새로운 연구가 나와도 종합적으로 인용하지 않는 행태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원수부는 고종의 국방력 증강 계획의 정점에 해당한다. 그 이전에도 고종이 친정을 하면서부터 최대 관심사가 국방력 강화였다. 아관망명(1896.2.11) 감행으로 왕권을 회복한 이래 대한제국 창건(1897.10.12)을 거치며 고종이 최우선으로 추진한 정책이 바로 첨단 무력의 확보였던 것이다.
경운궁의 망명지 성격을 없애기 위해 무엇보다 시급히 필요한 것은 당연히 국방력 강화였다. 한반도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서울과 지방의 강토를 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식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당시 용어로는 신식군대의 확보였다. 러시아에 군사교관 증파를 계속 요청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또 러시아·프랑스·영국·미국 가운데 한 국가를 동맹으로 얻거나 이들로부터 중립노선을 인정받는 것도 최단 시일 내에 한국이 자체 무력을 확보하는 것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고종의 국방력 강화에 대해 일제와 친일 개화파는 독립협회를 앞세워 그 힘을 빼려고 했다. 국방력 강화와 약화를 둘러싼 힘겨루기가 1898년 말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국방력 증강에 대한 고종의 절실한 갈망은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한 데서 극명하게 표현됐다(『고종실록』 광무1년·1897.8.14). 광무란 ‘빛나는 무력’이란 뜻이다. 의미론적으로 ‘상무(尙武)’를 뛰어넘는 말이다. 비밀스럽게 병력을 증강하던 고종은 1898년 7월 2일부터 그 의지를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주밀(綢繆·촘촘하고 빽빽)한 군비(軍備)는 국가의 최우선 급무니, 어느 때인들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금일에는 더욱 그렇다”고 공식 선언했다(『고종실록』 광무2년·1898.7.2).
국방력 강화 방식은 신속한 병력 증강과 신식무기의 도입을 통해 이뤄졌다. 병력 증강의 중심에는 러시아가 있었다. 러시아 교관들이 새로운 ‘시위대’를 훈련시키는 일이 최우선 작업이었다. 그렇게 새로 탄생한 시위대를 기반으로 하여 일제에 의해 오염된 기존의 친위대를 러시아 군대식으로 개편하는 일이 그 다음 작업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지방의 부대들을 러시아식으로 교육해 ‘진위대’로 전환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시위대는 대한제국의 황궁과 서울을 수비하는 첨단 무력의 신식 정예군이었다. 그 위상에 걸맞게 특급대우를 받았다. 1898년 5월 반포된 봉급명세에 의하면, 시위대 정위(대위)는 79원 83전을, 부위(중위)는 56원 66전을 받았다. 이것은 가령 호위대(국왕 행차 경호 담당) 정위의 봉급 34원, 부위 봉급 28원에 비하면 두 배나 많은 액수였다(서인한, 『대한제국의 군사제도』 182쪽).
시위대는 1896년 10월 입국한 드미트리 바실리예비치 푸차타 대령 휘하 13명의 러시아 교관단에 의해 훈련됐다. 기존의 친위대로부터 821명을 차출해 4개 중대, 1개 대대를 조직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이들에게는 러시아제 최신식 베르당 소총이 지급됐다.
1897년 9월 고종은 시위대 1개 대대를 증설해 시위대를 모두 2개 대대로 증편했다. 이 시위 2대대를 훈련시킨 것도 러시아 교관단이었다. 시위대는 1년 새 정예병 2000명의 대부대로 발전했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622쪽).
한국군 병력의 급성장에 놀란 것은 일제였다. 러시아 교관들부터 쫓아내려고 했다. 친일파의 소굴로 변질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왜 그렇게 반(反)러시아 집회를 지속적으로 열었는지 그 이유가 이런 데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 교관단을 해임하라는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극렬한 요구에 밀려 고종은 결국 1898년 3월 12일 이들을 해임했고, 러시아 교관들은 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들이 육성해 놓은 한국 장병들이 이제 교관과 조교가 되어 직접 사관과 신병의 훈련을 맡아 병력 증강을 계속할 수 있었다.
1898년 5월 27일엔 시위 제1·2대대를 통합해 시위 제1연대로 편성하는 칙령이 반포됐다. 1898년 7월 2일에는 시위대 육군을 10개 대대(1만 명)까지 증강하고 포병 1개 중대를 창설하는 계획이 발표됐다. 대포는 회선포(미제 개틀링 기관총)와 극노백(克魯伯·독일제 크루프 대포)이었다. 이 포병 중대는 시위 제1연대에 부속됐다.
보병부대와 포병부대가 창설되고 증강되면서 많은 근대적 무기들도 러시아·프랑스·독일 등으로부터 수입됐다. 1901~1902년 무렵 한국 정규·비정규 장병들이 보유한 소총은 도합 5만 정을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635쪽).
1901년 9월에는 ‘육군 피복 제조소’를 설치해 군복을 제작하는 등 군수물품과 무기의 자체 생산에도 일정한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황성신문 1901.10.17 ‘잡보:皮服製所’). 1901년부터 고종은 징병제를 계속 추진했으나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끝내 도입하지 못했다. 해군 창설도 전략상 보류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계속 증강된 대한제국 육군 병력은 1901년 초 통계에 잡힌 숫자를 보면 2만8833명에 달했다. 시위대(궁궐·도성수비대, 5192명), 호위대(국왕 행차 경호·735명), 친위대(4324명)를 합친 서울 중앙군 병력(1만251명)과 지방의 진위대 병력(1만8582명)을 합산한 수치다. 통계로 잡히지 않은 전국의 포군과 무관학교 생도 및 교관들을 더하면 한국군 총 병력은 3만 명을 훨씬 상회했다. 이에 따라 군 예산도 급증했다. 1896년 전체 예산 대비 군부 예산의 비율이 21.38%였고, 이로부터 가파르게 증가해 1901년 이후에는 전체 예산의 40%에 도달했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641쪽). 이 정도의 군 예산 비율이면 ‘비상계엄 군사국가’라고 해도 크게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경운궁의 망명지 성격을 없애기 위해 무엇보다 시급히 필요한 것은 당연히 국방력 강화였다. 한반도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서울과 지방의 강토를 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식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당시 용어로는 신식군대의 확보였다. 러시아에 군사교관 증파를 계속 요청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또 러시아·프랑스·영국·미국 가운데 한 국가를 동맹으로 얻거나 이들로부터 중립노선을 인정받는 것도 최단 시일 내에 한국이 자체 무력을 확보하는 것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고종의 국방력 강화에 대해 일제와 친일 개화파는 독립협회를 앞세워 그 힘을 빼려고 했다. 국방력 강화와 약화를 둘러싼 힘겨루기가 1898년 말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국방력 증강에 대한 고종의 절실한 갈망은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한 데서 극명하게 표현됐다(『고종실록』 광무1년·1897.8.14). 광무란 ‘빛나는 무력’이란 뜻이다. 의미론적으로 ‘상무(尙武)’를 뛰어넘는 말이다. 비밀스럽게 병력을 증강하던 고종은 1898년 7월 2일부터 그 의지를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주밀(綢繆·촘촘하고 빽빽)한 군비(軍備)는 국가의 최우선 급무니, 어느 때인들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금일에는 더욱 그렇다”고 공식 선언했다(『고종실록』 광무2년·1898.7.2).
국방력 강화 방식은 신속한 병력 증강과 신식무기의 도입을 통해 이뤄졌다. 병력 증강의 중심에는 러시아가 있었다. 러시아 교관들이 새로운 ‘시위대’를 훈련시키는 일이 최우선 작업이었다. 그렇게 새로 탄생한 시위대를 기반으로 하여 일제에 의해 오염된 기존의 친위대를 러시아 군대식으로 개편하는 일이 그 다음 작업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지방의 부대들을 러시아식으로 교육해 ‘진위대’로 전환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시위대는 대한제국의 황궁과 서울을 수비하는 첨단 무력의 신식 정예군이었다. 그 위상에 걸맞게 특급대우를 받았다. 1898년 5월 반포된 봉급명세에 의하면, 시위대 정위(대위)는 79원 83전을, 부위(중위)는 56원 66전을 받았다. 이것은 가령 호위대(국왕 행차 경호 담당) 정위의 봉급 34원, 부위 봉급 28원에 비하면 두 배나 많은 액수였다(서인한, 『대한제국의 군사제도』 182쪽).
시위대는 1896년 10월 입국한 드미트리 바실리예비치 푸차타 대령 휘하 13명의 러시아 교관단에 의해 훈련됐다. 기존의 친위대로부터 821명을 차출해 4개 중대, 1개 대대를 조직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이들에게는 러시아제 최신식 베르당 소총이 지급됐다.
1897년 9월 고종은 시위대 1개 대대를 증설해 시위대를 모두 2개 대대로 증편했다. 이 시위 2대대를 훈련시킨 것도 러시아 교관단이었다. 시위대는 1년 새 정예병 2000명의 대부대로 발전했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622쪽).
한국군 병력의 급성장에 놀란 것은 일제였다. 러시아 교관들부터 쫓아내려고 했다. 친일파의 소굴로 변질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왜 그렇게 반(反)러시아 집회를 지속적으로 열었는지 그 이유가 이런 데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 교관단을 해임하라는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극렬한 요구에 밀려 고종은 결국 1898년 3월 12일 이들을 해임했고, 러시아 교관들은 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들이 육성해 놓은 한국 장병들이 이제 교관과 조교가 되어 직접 사관과 신병의 훈련을 맡아 병력 증강을 계속할 수 있었다.
1898년 5월 27일엔 시위 제1·2대대를 통합해 시위 제1연대로 편성하는 칙령이 반포됐다. 1898년 7월 2일에는 시위대 육군을 10개 대대(1만 명)까지 증강하고 포병 1개 중대를 창설하는 계획이 발표됐다. 대포는 회선포(미제 개틀링 기관총)와 극노백(克魯伯·독일제 크루프 대포)이었다. 이 포병 중대는 시위 제1연대에 부속됐다.
보병부대와 포병부대가 창설되고 증강되면서 많은 근대적 무기들도 러시아·프랑스·독일 등으로부터 수입됐다. 1901~1902년 무렵 한국 정규·비정규 장병들이 보유한 소총은 도합 5만 정을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635쪽).
1901년 9월에는 ‘육군 피복 제조소’를 설치해 군복을 제작하는 등 군수물품과 무기의 자체 생산에도 일정한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황성신문 1901.10.17 ‘잡보:皮服製所’). 1901년부터 고종은 징병제를 계속 추진했으나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끝내 도입하지 못했다. 해군 창설도 전략상 보류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계속 증강된 대한제국 육군 병력은 1901년 초 통계에 잡힌 숫자를 보면 2만8833명에 달했다. 시위대(궁궐·도성수비대, 5192명), 호위대(국왕 행차 경호·735명), 친위대(4324명)를 합친 서울 중앙군 병력(1만251명)과 지방의 진위대 병력(1만8582명)을 합산한 수치다. 통계로 잡히지 않은 전국의 포군과 무관학교 생도 및 교관들을 더하면 한국군 총 병력은 3만 명을 훨씬 상회했다. 이에 따라 군 예산도 급증했다. 1896년 전체 예산 대비 군부 예산의 비율이 21.38%였고, 이로부터 가파르게 증가해 1901년 이후에는 전체 예산의 40%에 도달했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641쪽). 이 정도의 군 예산 비율이면 ‘비상계엄 군사국가’라고 해도 크게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3만 대군 배경으로 독도와 북간도 ‘행정 편입’
청나라의 신식군대는 1894~1895년의 청일전쟁에서 왜군에게 연전연패해 궤멸했고, 잔여 청군은 1900년 7~10월 만주에 진출한 러시아군과 충돌해 대패하고 청비(淸匪)로 전락했다. 따라서 1900년 전후 시기에 아시아·아프리카 국가 중 일본을 제외하고 어떤 나라도 3만 명의 신식군대를 가진 나라는 없었다. 병력 수만 많아진 것이 아니었다. 전투력도 일본을 제외할 때 아시아 최강의 군사강국이라 할 만했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671쪽).
나라가 망했는데 무슨 군사강국이었냐고 반발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것은 대한제국을 너무 우습게만 보는 것이다. 청나라의 신식군대와 세계적 군사강국 러시아의 육·해군을 다 이긴 일본군을 이기지 못했다고 해서 대한제국의 국방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침략적 병력이 아니라 중립국 지위를 얻기 위한 방어용이라면 3만 명이 결코 적은 군사는 아닌 것이다. 게다가 1907년 한국군이 강제 해산된 이후 이들이 주축이 되어 전개한 독립전쟁에서 연전연승하며 전투력을 과시한 사실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할텐데 오히려 잘 알려져 있지도 않은 실정이다.
대한제국은 3만 대군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해서 1900년 독도를 울릉군에 속한 속도(屬島)로 명확하게 행정적으로 편입시켰다. 또 한국인들이 들어가 살던 북간도를 1903년 행정체제에 편입시키고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했다. 700~1000리의 북간도를 대한제국의 근대적 영토로 확립한 것이다. 대한제국은 3000리 강토를 4000리로 늘려 광개토대왕 이래 최대의 영토를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군 함북진위대와 이범윤의 충의대(忠義隊)는 1901~1903년 북간도에 침입한 청병(淸兵)이나 청비와 싸워 연전연승함으로써 간도를 지켜냈다.
대한제국은 황제 직속의 국가정보기관도 운영했다. 이름이 ‘제국익문사(帝國益聞社)’다. 주로 일본 군대·경찰 및 친일파의 동향을 조사했다. 비밀기관이었기 때문에 기록이 남은 것이 거의 없어서 그 존재를 몰랐다가 1997년 무렵 이태진에 의해 ‘제국익문사 비보장정(秘報章程)’이 발굴·분석되었다. ‘통신원’으로 불린 정보원은 5종이었다. 상임통신원 16인, 보통통신원 15인, 특별통신원(외국공관·일본군사·항만시설 담당) 21인, 외국통신원 9인(도쿄 2, 오사카 1, 나가사키 1, 북경 1, 상해 1, 여순 1, 블라디보스토크 1) 등 61명 이상이었다(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393~402쪽).
러시아에 국가정보국이 설치된 것이 1903년 1월 21일이다. 그것도 참모본부 산하에 두고 헌병 대위가 초대 국장을 맡은 작은 규모였다(최덕규 ‘고종황제의 독립운동과 러시아 상하이정보국(1904~1909)’ 44쪽). 그런 것과 비교하면 고종이 1902년 6월 ‘제국익문사 비보장정’까지 제정하며 설치한 제국익문사는 매우 앞선 정보정책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중앙의 시위대와 친위대, 그리고 지방의 진위대가 모두 대폭 증강됨에 따라 무관(장교)의 수요도 늘었다. 이에 따라 1898년 7월 1일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가 옛 훈련도감 자리에 교사를 짓고 개교했다.
1898년 1회 입학 생도 200명은 1년6개월 교련을 마치고 1900년 1월 128명이 임관했다. 1900년 11월 제2회 때도 입학 생도 350명 중 거의 전원에 해당하는 348명이 임관했다(임재찬, 『구한말 육군무관학교 연구』 39쪽).
이렇게 임관한 장교의 수는 1904년까지 도합 476명에 달했다. 이 장교 집단에는 단지 좋은 대우 때문에 군문(軍門)에 들어온 입신 출세자가 많았지만, 자주독립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들어온 ‘민족 장교’도 적지 않았다(지복영, 『역사의 수레를 끌고 밀며』 24쪽).
뜻있는 장교들은 다수가 아니었지만 그 역할은 지대했다. 1907년 한국군 해산 이후 각종 의병과 항일전쟁을 이끌었다. 특히 1920년대 독립전쟁에서의 혁혁한 성과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에 의해 주도됐다(박성수 외, 『현대사 속의 국군』, 전쟁기념사업회, 1990, 95쪽).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첫 군무총장 이동휘,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김좌진,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등이 모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이었다. 신흥무관학교와 밀산무관학교 등 만주 소재 독립군 무관학교의 군사교관들도 대부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이었다. 1911년부터 1919년까지 신흥무관학교 한 곳에서 육성된 장교의 수만 무려 8000명에 달했다.
독립군 장교 양성의 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국 내 각종 군관학교에서의 한국군 위탁교육을 거쳐 1940년 9월 17일 창군된 광복군으로 이어졌다. 그 맥은 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육군사관학교’로 이어졌으니, 오늘날 대한민국 육군 장교의 뿌리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건군사(建軍史)』, 2002, 48쪽).
나라가 망했는데 무슨 군사강국이었냐고 반발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것은 대한제국을 너무 우습게만 보는 것이다. 청나라의 신식군대와 세계적 군사강국 러시아의 육·해군을 다 이긴 일본군을 이기지 못했다고 해서 대한제국의 국방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침략적 병력이 아니라 중립국 지위를 얻기 위한 방어용이라면 3만 명이 결코 적은 군사는 아닌 것이다. 게다가 1907년 한국군이 강제 해산된 이후 이들이 주축이 되어 전개한 독립전쟁에서 연전연승하며 전투력을 과시한 사실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할텐데 오히려 잘 알려져 있지도 않은 실정이다.
대한제국은 3만 대군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해서 1900년 독도를 울릉군에 속한 속도(屬島)로 명확하게 행정적으로 편입시켰다. 또 한국인들이 들어가 살던 북간도를 1903년 행정체제에 편입시키고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했다. 700~1000리의 북간도를 대한제국의 근대적 영토로 확립한 것이다. 대한제국은 3000리 강토를 4000리로 늘려 광개토대왕 이래 최대의 영토를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군 함북진위대와 이범윤의 충의대(忠義隊)는 1901~1903년 북간도에 침입한 청병(淸兵)이나 청비와 싸워 연전연승함으로써 간도를 지켜냈다.
대한제국은 황제 직속의 국가정보기관도 운영했다. 이름이 ‘제국익문사(帝國益聞社)’다. 주로 일본 군대·경찰 및 친일파의 동향을 조사했다. 비밀기관이었기 때문에 기록이 남은 것이 거의 없어서 그 존재를 몰랐다가 1997년 무렵 이태진에 의해 ‘제국익문사 비보장정(秘報章程)’이 발굴·분석되었다. ‘통신원’으로 불린 정보원은 5종이었다. 상임통신원 16인, 보통통신원 15인, 특별통신원(외국공관·일본군사·항만시설 담당) 21인, 외국통신원 9인(도쿄 2, 오사카 1, 나가사키 1, 북경 1, 상해 1, 여순 1, 블라디보스토크 1) 등 61명 이상이었다(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393~402쪽).
러시아에 국가정보국이 설치된 것이 1903년 1월 21일이다. 그것도 참모본부 산하에 두고 헌병 대위가 초대 국장을 맡은 작은 규모였다(최덕규 ‘고종황제의 독립운동과 러시아 상하이정보국(1904~1909)’ 44쪽). 그런 것과 비교하면 고종이 1902년 6월 ‘제국익문사 비보장정’까지 제정하며 설치한 제국익문사는 매우 앞선 정보정책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중앙의 시위대와 친위대, 그리고 지방의 진위대가 모두 대폭 증강됨에 따라 무관(장교)의 수요도 늘었다. 이에 따라 1898년 7월 1일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가 옛 훈련도감 자리에 교사를 짓고 개교했다.
1898년 1회 입학 생도 200명은 1년6개월 교련을 마치고 1900년 1월 128명이 임관했다. 1900년 11월 제2회 때도 입학 생도 350명 중 거의 전원에 해당하는 348명이 임관했다(임재찬, 『구한말 육군무관학교 연구』 39쪽).
이렇게 임관한 장교의 수는 1904년까지 도합 476명에 달했다. 이 장교 집단에는 단지 좋은 대우 때문에 군문(軍門)에 들어온 입신 출세자가 많았지만, 자주독립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들어온 ‘민족 장교’도 적지 않았다(지복영, 『역사의 수레를 끌고 밀며』 24쪽).
뜻있는 장교들은 다수가 아니었지만 그 역할은 지대했다. 1907년 한국군 해산 이후 각종 의병과 항일전쟁을 이끌었다. 특히 1920년대 독립전쟁에서의 혁혁한 성과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에 의해 주도됐다(박성수 외, 『현대사 속의 국군』, 전쟁기념사업회, 1990, 95쪽).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첫 군무총장 이동휘,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김좌진,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등이 모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이었다. 신흥무관학교와 밀산무관학교 등 만주 소재 독립군 무관학교의 군사교관들도 대부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이었다. 1911년부터 1919년까지 신흥무관학교 한 곳에서 육성된 장교의 수만 무려 8000명에 달했다.
독립군 장교 양성의 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국 내 각종 군관학교에서의 한국군 위탁교육을 거쳐 1940년 9월 17일 창군된 광복군으로 이어졌다. 그 맥은 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육군사관학교’로 이어졌으니, 오늘날 대한민국 육군 장교의 뿌리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건군사(建軍史)』, 2002, 48쪽).
자문 전문가와 기관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국립고궁박물관 대한제국관, 국립전주박물관
참고자료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황태연·청계·2017), 『고종시대의 재조명』(이태진·태학사·2000), 『미래를 여는 우리 근현대사』(한영우ㆍ경세원ㆍ2016), 『대한제국의 군사제도』(서인한·혜안·2000), 『구한말 육군무관학교 연구』(임재찬·제일문화사·1992), ‘고종황제의 독립운동과 러시아 상하이정보국’(최덕규·『한국민족운동사연구』81·2014), 『현대사 속의 국군』(박성수 외·전쟁기념사업회·1990), 『역사의 수레를 끌고 밀며』(지복영·문학과지성사·1995)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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