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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조선의 참모로 산다는 것'] (19) 광해군 핵심 참모 정인홍 반대파 숙청 앞장선 '왕의 남자' 쓸쓸한 결말

바람아님 2017. 11. 21. 09:04
매일이코노미 2017.11.20. 09:42
임진왜란 후 어수선한 정국을 뒤로하고 광해군 시대가 열렸다. 광해군이 조선의 왕으로 등극하면서 정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은 북인 출신 정인홍(鄭仁弘, 1535~1623년)이었다. 정인홍은 1608년 광해군 즉위 당시 70세가 넘었지만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 향촌사회에 기반, 조식 수제자라는 학문적 정통성이 있었다.

정인홍의 자는 덕원, 호는 내암, 본관은 서산이다. 경남 합천 출신으로 퇴계 이황과 더불어 영남학파 양대 산맥으로 활동했던 조식 문하에 들어가 수제자가 됐다.


정인홍이 광해군대 정국 핵심 인물로 등장하게 된 결정적 요인은 선조 후반 안개 정국 속에서 광해군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켰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직적인 의병을 규합해 적극적인 항전 활동에 나선 정인홍과 왕세자로서 분조(分朝) 임무를 띠고 참전한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다. 전란이 끝난 후 류성룡이 ‘주화오국(主和誤國·화의를 주장해 나라를 그르침)’이라는 논리로 탄핵을 받고 실각하자, 전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던 북인들이 정국 일선에 등장했고 정인홍이 그 중심에 섰다.


1602년(선조 35년) 대사헌에 오르면서 정인홍 시대의 막이 열린다. 강한 지조를 바탕으로 반대 당파를 철저히 비판했던 정인홍에게 대사헌은 상당히 어울리는 관직이었다.

임진왜란 때 왕세자로 책봉돼 선조 후계자가 됐던 광해군은 1606년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으면서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된다. 북인 내부에서도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小北)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大北)으로 당파가 나눠져 대립했다. 영창대군을 후원하는 선조의 마음을 읽은 유영경이 소북 핵심이었고, 정인홍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 우두머리였다. 정인홍은 상소문을 통해 유영경 일파를 공격했지만, 오히려 선조의 미움을 샀다. 결국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 핵심 인물은 유배에 처해졌다.


하지만 1608년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정국의 운명을 바꿔놓는다. 광해군은 즉위 후 바로 정인홍을 석방하고, 최측근으로 삼았다. 다만 정인홍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진 않았다. 광해군이 거듭 정인홍에게 자신을 직접 보좌해줄 것을 청했지만 고령과 신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며 관직에 오르는 대신 고향인 합천에서 왕을 돕겠다고 했다. 당시 광해군과 정인홍이 주고받은 대화는 실록과 ‘내암집’ 등에 실려 있다. 광해군은 여러 차례 정인홍에게 국정 현안을 물었고 정인홍 의견을 대부분 국정에 반영했다.

“광해조 때 이이첨이 일을 꾸며 정인홍을 삼공 서열에 두고 큰일마다 서로 화합해 유현(儒賢)의 논의임을 빙자해 그들의 속마음을 실천하였다. 이로부터 당국자들이 추종해 조정 정국이 일변하였다. 문득 임하(林下)의 한 사람을 추대해 영수로 삼고 비록 어짐과 간사함이 다르지만 산림에 갖다 붙이지 않음이 없었다.”

근대학자 황현이 ‘매천야록’에 쓴 내용이다. 재야에서 정국 실세로 활약하는 의미의 ‘산림’ 원조로 정인홍을 언급한 것은 광해군 시대 그의 높은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인홍이 최고 실세로 활약한 만큼 정치가로서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지만 학문 수준 또한 상당했다고 전해진다. 각종 소차(疏箚·상소와 차자로 차자는 상소에 비해 서식이 간단)에서 유교 경전을 자유롭게 인용한 것이나, 1602년 대사헌으로 명을 받아 상경하자 부음정(孚飮亭)으로 수백 명 제자들이 찾아갔다는 기록 등을 보면 학자로서의 명성도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정인홍의 학문과 사상은 스승인 조식의 영향력, 즉 ‘남명학파’의 흐름 속에서 나왔다. 실천을 중시해 경의(敬義)사상을 핵심으로 하고, 성리학 이외에도 다양한 학문에 깊은 관심을 보인 조식의 사상이 정인홍에게 깊은 영향을 줬다.


정인홍 학문이 실천에 중점을 뒀다는 것은 그의 문집에 수록된 글에도 잘 드러난다. 성리학 이론에 관한 글이 거의 없고 정치 철학과 현실관, 백성의 경제 생활 등에 대한 생각이 주로 담겨 있다. 또 정인홍은 노장·불교·양명학 등 다양한 사상을 흡수했으며, 민생 문제나 상공업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백성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보민(保民)사상’을 강조했다. 군주를 정점으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뒤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게 ‘보민사상’이다. 광해군 즉위 후 왕이 정당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되, 왕권에 위협이 되는 요소는 철저히 없애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도록 광해군에게 권했다. 정인홍이 서인이나 남인, 소북과 같이 반대 당파에 대해 시종일관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 것은 이런 정치 성향과 관련 깊다.


정인홍은 직접 관직에 진출해 왕의 참모로서 권력을 행사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대리인 이이첨이 중앙 정계 핵심으로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뜻대로 정국이 운영됐다. 정국에 주요한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반대파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응징했으며 광해군 중심의 왕권을 확립하는 데 물심양면 도왔다.


즉위 초 임해군의 역모 혐의가 드러났을 때 이원익, 이항복 등 원로대신들이 형에게 은혜를 베풀자는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한 반면, 정인홍은 반역이 명백한 이상 처형이 불가하다 주장했고 결국 임해군은 귀양지에서 피살됐다. 이후 정국을 뜨겁게 달군 오현의 성균관 문묘종사(文廟從祀·공자를 모신 성균관 문묘에 학문이 뛰어난 조선의 학자를 배향함) 논의에서 정인홍은 이언적과 이황을 문묘에서 내쫓는 대신 스승인 조식의 문묘종사를 강행해 반발을 샀다. 그럼에도 정인홍에 대한 광해군 신임은 여전히 두터웠다.


1613년 영창대군 처벌이 쟁점으로 떠오르자, 일단 정인홍은 영창대군을 구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것은 영창대군을 보호하는 것보다 광해군이 짊어질 정치적 부담을 먼저 고려한 선택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광해군 왕통에 도전하는 세력에 대한 척결을 주도했다.

광해군 입장에서 정인홍은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후원자가 되는 든든한 고목(古木) 같은 존재였다. 광해군의 왕권 안정이라는 목표만을 위해 정국에 임했기에 정인홍은 여론 불만은 물론이고, 자파 문인들이 이탈하는 상황도 방관했다.


선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정국에 등장한 정인홍은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 고령으로 의병장으로 나설 만큼 행동하고 실천하는 양심으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정국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을 때 상대 당파에 대해 시종일관 강경하고 과격하게 대응한 게 독이 됐다. 이미 80세가 넘은 고령의 정치인이라는 점 또한 정인홍이 쉽게 정치 노선을 바꾸지 못한 원인이 됐다. 정인홍의 말년이 좋지 못했던 또 다른 원인은 대북 정권 공동 주축인 권신 이이첨의 존재였다. 이이첨은 정인홍 위세와 명성을 십분 활용해 주요 정치 현안이 있을 때마다 정인홍의 상소를 대신 써서 바치고 난 뒤 정인홍에게 그 사실을 통보할 정도로 권력을 농단했다. 정인홍은 그렇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정인홍의 나이 89세였지만 반정 주축인 서인 세력은 정인홍을 살려두지 않았다. 광해군 시대에 강성과 비타협의 아이콘 정인홍에게 당한 분노와 설움이 폭발했기 때문일 터다.

처형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정인홍은 국가에 대한 의리(의병), 왕(광해군)에 대한 의리, 스승(조식)에 대한 의리를 일관되게 지켰다. 정인홍이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이언적과 이황에 대한 문묘 출향을 주장하고, 궁중에 피를 부른 것은 시종일관 스승에 대한 존경과 왕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나친 과격성, 반대 세력을 조금도 용인하지 않는 비타협적인 태도로 큰 반발을 불러왔다는 점은 정인홍의 실책이었다.


인조반정 이후 정인홍은 조선 후기 내내 ‘역적’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어야 했다. 그의 강한 기질과 개성은 지금까지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묘사됐다.

하지만 정인홍의 삶은 원칙과 신념을 위해 굽힘 없이 살아간 선비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광해군 참모 정인홍에 대한 연구는 인조반정 이후 역사에서 사라진 북인 세력 복원에도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일러스트 : 정윤정]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33호 (2017.11.15~11.21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