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11.29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1959년 10월 30일 금요일. 경주 감은사지 발굴이 시작됐다.
광복 후 처음 실시하는 절터 발굴이었기에 김재원 국립박물관장을 비롯한 조사단원은 모두 긴장했다.
특히 훗날 '발굴왕'의 명성을 얻는 김정기 학예관도 이 발굴을 위해 특채된 신예였다.
감은사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외함),
보물 366호, 높이 21.6㎝, 국립중앙박물관.
조사원들이 주목한 것은 금당 터였다.
신라 문무왕의 화신인 용이 들어와 머물 수 있도록
금당 섬돌 아래에 구멍을 뚫어놓았다는 삼국유사의 신이한
기록을 확인해 볼 참이었다.
발굴 5일째. 편평한 석재와 돌기둥을 조립해 만든 시설이
전모를 드러냈다. 건물 바닥에 공간을 두기 위해 마련한
특별한 구조였기에 조사단원 모두는 환호했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이 구조물을 방공호로 사용하는 바람에
일부 훼손된 점이 아쉬웠다.
이어 12월 12일까지 중문, 강당, 회랑 등 사찰의 평면 구조를
확인한 다음 발굴 조사를 종료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문교부는 같은 해 성탄절부터
보존 상태가 나빴던 감은사지 서쪽 석탑에 대한 해체 공사를
시작했고 감은사지 발굴을 진행한 국립박물관에 감독을
맡겼다. 탑 부재를 해체하던 중 12월 31일에 이르러
3층 탑신에서 창건 당시의 사리장엄구를 발견했다.
예기치 못한 일이었고 보존과학자가 없던 시절이라
고고학자들이 직접 유물을 수습했다.
훗날 1996년에 동쪽 석탑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에 비해 보존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불법(佛法)의
수호신 사천왕,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 조각과 함께
유려한 문양이 다양하게 표현돼 있어 7세기 후반 신라
공예 문화의 빼어난 수준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인생의 황금기를 전장에서 보내며 나라를 지켰고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도 "내가 죽으면 반드시 동해에 장사 지내라.
죽어서라도 호국의 용이 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을 것"이라 유언한 '신라 바보' 문무왕, 불법이란 큰 그릇에 부왕의 호국 의지와
자신의 효심을 담아낸 신문왕. 감은사지 발굴은 이 두 신라 왕을 전설의 숲에서 역사의 무대로 옮겨주었다.
(2014_1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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