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11.22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금동관, 입점리1호분, 국립전주박물관, 너비(하부) 14.8㎝.
1986년 2월 2일, 일요일 아침이었다.
익산 입점리에 거주하던 임성수 학생(당시 고교 1년)은 칡뿌리를 캐러 동네 뒷산에
올랐다. 산 정상부 가까운 곳에서 토끼 굴처럼 생긴 구덩이를 발견한 그는
호기심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그 속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공간 속엔 난생처음 보는 보물들이 쫙 깔려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무덤 속 유물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사적 제347호 익산 입점리 고분군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임군은 반출한 유물 48점을 자신의 집으로 가져갔다가 4일 만에 당국에 신고했다.
현지로 급파된 문화재관리국 김기웅 전문위원과 윤근일 학예사는 신고유물 가운데 금동관과 금동신발뿐만 아니라
중국 청자까지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긴급 발굴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2월 27일 문화재연구소 조사단이 발굴을 시작하자 곧 무덤의 전모가 드러났다.
돌을 쌓아 만든 횡혈식석실분이었는데 공주 송산리 고분군을 비롯한 백제 왕족 무덤과 같은 구조였다.
발굴 결과 임군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금동관 조각, 금귀걸이, 유리구슬, 화살통부속구 등이 남아 있었다.
이 소식은 언론에도 알려져 '무령왕릉보다 앞선 것으로 보이는 금동관' '익산고분, 에다후나야마 고분 문화의 원류'라는
제하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고깔 모양 뼈대에 꽃봉오리 모양 장식이 부착된 입점리 금동관의 외형이 일본 에다후나야마
(江田船山) 고분 출토품과 비슷했기에 주목받은 것이다. 1986년 이전에는 에다후나야마 고분 금동관의 제작지를 왜(倭)로
보는 견해가 다수였지만, 입점리 고분에 이어 2003년 공주 수촌리 고분군에서도 흡사한 금동관 2점이 발굴됨에 따라
백제로 보는 견해가 많아졌다.
한겨울 가파른 산 위에서 우연히 발견한 백제고분 1기. 정식 발굴 이전에 유물 대부분이 반출되어버린 아쉬움도 있지만
이 무덤에는 잃어버린 백제사의 한 페이지를 복원할 수 있는 여러 정보가 들어 있었다.
특히 백제가 바다 건너 왜와 어떤 방식으로 교류했는지 생생히 보여주는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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